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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10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선사/청동기,선사/철기
집필자 이영문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고인돌과 옹관 고분으로 대표되는 고대 문화.

[영암의 고고학적 위치]

영암 지역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와 접해 있고 영산강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은 서해로 흘러드는 전라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강이며,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와 문물의 유입 통로 역할을 하였다. 영산강 유역은 낮고 평평한 구릉지와 강변 평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영산강 하구언 조성으로 형성된 영산호와 이어지는 남해만의 동쪽과 남쪽에 걸쳐 있는 영암 지역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삼국 시대의 옹관 고분이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고인돌 문화는 밀집도와 분포 수에서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며, 대형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남해만에 인접한 시종면 일대에 밀집된 옹관 고분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인용 무덤이며, 대형 독널을 매장 시설로 사용한 점에서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인돌 밀집 분포지와 고인돌 문화를 형성한 영암]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구조물인 거석 기념물의 한 유형으로, 고인[支, 撑]과 돌[石]로 이루어져 ‘고여 있는 돌’이란 뜻이며 한자로 지석묘(支石墓)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고인돌, 고임돌, 고엔돌, 굄돌, 괸돌, 되무덤, 도무덤 등 여러 명칭으로도 불린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탁자식]과 대석개묘(大石蓋墓)[개석식]로, 일본에서는 지석묘로, 영어로는 돌멘(Dolmen)[탁자 모양의 돌]이라고 쓰고 있다.

영암 지역에는 유실되거나 훼손된 것까지 포함하면 원래 166곳에 1,200여 기가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주암[배바위]이나 호동[범바위] 등 고인돌의 형태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 경우도 있고, 고인돌을 칠성 바위·두꺼비 바위·바우백이·상여 바위·장군 바위라고 부른 곳도 있다.

고인돌의 입지는 강가나 하천변의 충적지(沖積地), 구릉 정상부와 그 비탈면, 고갯마루, 산기슭 등 사람들이 활동하는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들은 대개 수 기 또는 수십 기가 무리를 이루면서 열을 지어 서 있다. 하지만 평지보다 높은 곳, 즉 구릉 정상이나 산기슭의 경우 단독으로 분포된 것도 있다. 형태는 대형의 탁자식과 기반식으로, 제단과 같은 집단의 상징적인 기념물로 축조되었다. 영암 지역의 고인돌은 이와 같은 입지를 보이고 있으나, 평지[33%]와 구릉[48%]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인돌의 형태는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등으로 분류한다.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어진 판석 3매 또는 4매로 짜 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돌을 얹어 놓아 마치 책상과 같은 모양이다. 영암 지역에서는 서호면 소산리 소흘 고인돌금정면 용흥리 옥포 고인돌이 대표적으로, 모두 장벽석 2매만 남아 있다. 이 탁자식 고인돌은 학산면 용산리 산소 고인돌처럼 1기만 따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군집에서 1기씩만 존재하는 점과 기반식 고인돌보다 규모가 작다는 특징이 있다.

영암 지역의 기반식 고인돌은 군서면 월곡리 주암 고인돌군영암읍 엄길리 고인돌군이 대표적이다. 군서면 월곡리 주암 고인돌군은 받침돌 4개가 덮개돌을 괴고 있으며, 영암읍 엄길리 고인돌군은 받침돌 8개가 괴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무덤방이 드러나 있다. 영암 기반식 고인돌의 특징은 2m 이상 두꺼운 덮개돌이나 1m 내외의 두께에 길이가 7m 정도 되는 거대한 고인돌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영암 지역에서 발굴된 고인돌들은 대부분 개석식 고인돌에 속한 것으로, 무덤방들이 열지어 있거나 무리지어 있다. 이 형식은 주로 무덤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간돌검, 돌화살촉, 돌칼, 옥 등이 부장 유물로 발견된다. 이 외에 땅위에 여러 매의 판상석을 잇대어 조립한 소위 위석식[또는 제주식] 고인돌도 있으나 영암에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고인돌의 출토 유물은 무덤방 안의 부장용 유물과 무덤방 주변의 의례용 유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장용 유물은 죽은 이가 사용한 물건 또는 특별히 제작한 유물로, 간 돌검[석검]·간 화살촉[석촉]·붉은 간 토기[홍도 또는 적색 마연 토기]·가지문 토기[채문 토기]·청동기·옥 등의 장신구류 등이 있다. 영암 지역에서는 삼호면 산호리 동암 고인돌[간 돌검], 서호면 엄길리 서엄길 고인돌[간 돌검], 서호면 청용리 고인돌[세형동검과 검 끝 자루 장식], 삼호면 망산리 망산 고인돌[굽은 옥과 대롱 옥] 등에서 부장 유물이 발굴되었다. 의례용 유물로는 고인돌 축조와 관련된 의례 행위에 쓰이거나 죽은 이를 위한 장송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인데, 유물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깨뜨리거나 부러뜨려 모두 조각만 발견된다. 영암 고인돌 중 서호면 엄길리 서엄길에서 검정 간 토기가 매납 유물로, 삼호면 서호리 소서호에서 세모꼴 돌칼이 두 조각으로 깨뜨려진 채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부장 유물의 제작 연대 측정 결과로 미루어 기원전 12세기 전후 시기에서 기원전 3~2세기에 걸쳐 약 1천 년간 축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편년에서 보면 전기 말에서 중기가 그 중심이다. 영암 지역의 고인돌에서 측정된 방사성 탄소 측정 연대는 기원전 1050년[삼호면 서호리 소서호], 기원전 640년, 기원전 490년, 기원전 480년[서호면 엄길리 서엄길] 등이다. 이로 보면 기원전 1000년 무렵인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암 지역 고인돌의 특징은 1,2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인데, 영암 지역이 영산강 유역의 밀집 분포지 중 하나이다. 탁자식과 기반식, 개석식 등 다양한 고인돌 형태들이 발견되고 있다. 금정면 용흥리 옥포서호면 소산리 소흘의 탁자식 고인돌은 기반식과 개석식이 한 군집에서 공존하고 있는데, 탁자식은 1기만 존재한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약 50여 기의 탁자식 고인돌 중 영암에서만 10여 기가 발견되었다. 영암의 고인돌을 통해 우리나라 탁자식 고인돌의 남방 한계선이 영산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서호면학산면의 고인돌 중에는 길이 6~7m나 되는 거대한 기반식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서호면 엄길리처럼 기반식 고인돌 중앙에 탁자식 형태의 무덤방이 있는 기반식과 탁자식의 혼합 형태도 눈에 띄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인돌은 대체로 부장 유물이 매우 빈약하지만, 영암 지역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굽은 옥과 대롱 옥·간 돌검 등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과 함께 돌칼·홈자귀·갈돌·돌 대팻날·돌 끌 등 생활 용구들도 발견되는 등 주변 지역과는 달리 비교적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영산강 유역 최대의 옹관 고분 문화]

독무덤[옹관묘(甕棺墓)]는 흙으로 빚어 구운 용기를 관처럼 사용하여 주검을 묻은 무덤의 한 유형이다. 형태는 크기가 같은 독은 아가리를 맞대고 크기가 다른 것은 한쪽을 약간 삽입시킨 이음식[합구식(合口式)]이 일반적이다. 외독식[단옹식(單甕式)]과 3독식[삼옹식(三甕式)]도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어느 형식이건 모두 이음매나 아가리를 차진 진흙을 두텁게 발라 밀폐시키고 있다. 이러한 독무덤은 항아리 모양의 토기를 사용한 것이어서 기와를 이용한 와관묘(瓦棺墓), 상자 모양의 관을 쓴 도관묘(陶棺墓), 화장 용기로 사용한 골호(骨壺) 또는 뼈 단지와는 구별된다.

1. 영암 지역의 독무덤[옹관묘] 조사 현황

영암 지역의 독무덤에 대한 조사는 일제 강점기에 행해진 나주 반남면 지역을 제외하면 해방 이후 시종면 일대에서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1960년 국립 박물관에서 시종면 내동리 7호분[옹관묘 6기], 1967년 경희 대학교 박물관에서 내동리 1~6호분[옹관묘 10기]을 조사하면서 영산강 유역 옹관 고분과 관련하여 영암군 시종면 일대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80년에 와서 국립 광주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기획 발굴과 발견·신고된 독널에 대한 긴급 수습 발굴이 행해지면서 옹관 고분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이 시기 내동리, 만수리 2호와 4호분, 내동리 초분골, 선황리 계양, 도포 수산리 조감, 양계리 금동, 옥야리 신산, 와우리 서리매리제, 월송리 송산, 태간리 등의 12개소에서 28기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1990년대에는 옥야리[목포 대학교 박물관 조사]와 신연리 9호분[국립 광주 박물관 조사] 등에서 11기의 독무덤이 조사되었다. 2000년대 초에는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학산면 금계리미암면 선황리 등에서 12기의 독무덤이 추가로 조사되어, 영암 지역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모두 합쳐 18개소 67기이다. 2000년 후반부터는 국립 나주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시종면 옥야리 장동 고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중심 매장 시설은 돌방무덤이지만 주위에서 독널 조각이 발견되었다.

2. 영암 지역 독무덤의 형성과 변천

영암 지역 독무덤은 발생기인 3세기경 대형 독널이 등장하며, 독의 형태는 목이 뚜렷하고 바라진 항아리 모양이다. 독널은 일상용인 옹형이나 호형 토기와 전용 독인 아가리를 맞댄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금계리선황리 계양 독무덤이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독 형태를 선황리식이라고 한다. 주로 네모나거나 사다리꼴 형태의 도랑 무덤[주구묘(周溝墓)]에 독널이 추가되면서 널무덤 또는 구덩무덤과 병행하거나 단독으로 발견된다.

영암 지역의 발생기 독널에서는 바리형 토기·둥근 바닥의 항아리·겹아가리 토기[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등의 토기와 옥이 부장 유물로 발견된다.

독무덤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는 4세기경에는 독 형태가 점차 뚜렷한 목이 없어지면서 U자 모양으로 바뀌어 영산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이 U자 모양 독도 이른 시기에는 독의 두께가 고르고 바닥에 둥근 돌기가 붙어 있으며, 소성 온도도 낮아 연질에 가깝다.

독널은 원형, 타원형, 제형[사다리꼴] 등 낮은 이형 분구(異形噴口)에 수평으로 추가장이 이루어져서 한 분구 안에 여러 독널이 안치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내동리 초분골, 만수리 4호분, 신연리 3호분, 옥야리, 와우리, 월송리 송산 고분이 있다.

발전기 옹관에는 두 귀 토기[양이부호(兩耳附壺)]·큰 입 단지형 토기[광구소호(廣口小壺)]·구멍 뚫린 큰 입 토기[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납작 바닥 항아리[평저호(平底壺)]·둥근 바닥 항아리[원저호(圓底壺)]·입 큰 단지형 토기[광구호(廣口壺)]·목 긴 토기[장경호(長頸壺)] 등 다양한 토기와 함께 쇠 낫[철겸(鐵鎌)]·쇠칼[철도자(鐵刀子)]·쇠도끼[철부(鐵斧)]·쇠못[철정(鐵鋌)] 등의 생활용 철제 도구, 장신구인 굽은 옥·대롱 옥·다면 옥·소옥 등 옥류가 발견된다.

5세기경은 독무덤의 성행기로 전형적인 U자형 독이 등장하며, 차츰 경질화되면서 두께도 아가리 쪽이 훨씬 두터워지고 바닥에는 음각 원 무늬가 돌려진다. 분구도 높은 분구로 대형화되고 무덤도 높아지면서 독널도 아래위로 여러 기가 안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은 내동리, 양계리 금동, 태간리 일곱 뫼 고분이 있다.

성행기 옹관에는 둥근 바닥 항아리·단지형 토기·구멍 뚫린 큰 입 토기·뚜껑 접시[개배(蓋杯)]·목 긴 토기·완형 토기·바리형 토기·병형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6세기경은 쇠퇴·소멸기로 U자형 독의 바닥이 편평해지고, 음각 원 무늬가 사라진다. 독의 몸통 전체에는 문살무늬[格子文]가 새겨지고 어깨 부위에는 톱니무늬[鋸齒文]가 깊게 새겨진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바닥에 원 무늬 대신 둥근 구멍을 뚫거나 어깨에 돋을 띠를 돌린 변형도 있다. 독무덤은 단독으로 조성되지 못하고 다른 형태의 고분에 추가된 양상으로 발견된다. 이 시기에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등장하며 공존하지만 백제계 굴식 돌방무덤의 등장으로 독무덤은 완전히 소멸되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유적은 수산리 조감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은 한 분구 안에서 돌방무덤과 독널이 함께 발견되었다.

쇠퇴기 옹관에는 굽다리 단지 토기[고배(高杯)],·접시형 토기·완형 토기 등이 발견된다.

영암 지역 독무덤은 출토 유물로 미루어 3세기를 전후하여 발생하였고,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엽까지 크게 유행하다가 5세기 후반 이후는 돌방무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는 돌방무덤이 백제 지배층의 무덤 양식이란 점에서 백제의 지방 통치에 속하게 됨을 의미한다. 영암 지역의 옹관 고분은 백제 영역 안의 고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그 전통이 돌방무덤 수용 초기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서 백제에 예속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지역 토착 지배 세력의 정치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영암 지역 옹관 고분의 특징]

영암군 시종면을 중심으로 독이 대형화되어 성인용 무덤 널로 크게 유행하면서, 대형의 봉토를 가진 소위 고총고분의 매장 주체 시설로 전용 독널이 이용된 옹관 고분이 축조되었다. 영산강 유역 독무덤의 발생 중심지로 영암 시종면 일대를 상정하고 있으며, 성행기에는 인근의 나주 반남 일대로 중심지가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분의 형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원형과 방대형을 비롯하여 사다리꼴, 장타원형, 장고형 등으로 다양하다. 규모도 삼국의 왕 무덤과 비견되는 지름이나 밑변이 40m에 이르는 옹관 고분도 축조되었다. 또, 하나의 거대한 봉토 속에 여러 기의 매장 시설이 들어 있고, 대형 고분에서는 봉토의 정상부에서 깊지 않게 묻혀 있는 지상식이란 점이 특징이다. 이른 시기의 소형 고분 가운데는 지하식도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지상식이 많다. 이러한 다장(多葬)의 풍습은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의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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