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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90
한자 永保亭事件
이칭/별칭 형제봉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2년 6월 4일연표보기 - 영보정 사건, 노동절 기념식을 계기로 발생
발생|시작 장소 영보정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6지도보기
성격 항일 시위|농민 시위

[정의]

1932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일어난 시위 사건.

[개설]

영암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모여 지주의 소작권 이동을 거부하고 지주의 횡포와 일제의 지배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1932년 영암 공산주의자 협의회는 당시 농민 문제의 핵심이었던 소작권의 잦은 이동을 막고 농민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지지자들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들은 1932년 6월 4일 영보정(永保亭)에 모여 대오를 이루고 소작권 이동에 항의하는 폭력 시위를 벌였는데,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청년과 농민들이 체포되고 수십 명이 구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김판권(金判權)·최판옥(崔判玉) 등 영암 지역 사회주의자들은 1931년 8월 비밀 결사 연구회를 조직하고 10월 합법적 농민 조합을 결성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에 이들은 보통학교 동창회, 청년회, 야학 등 기존의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튼튼한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하여 혁명적 농민 조합을 결성하려 하였다. 특히 야학에서 계급 의식을 고취하고 단결의 힘을 강조하였다. 이런 가운데 1932년 4월 이들은 영암 공산주의자 협의회를 결성하고 농민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였다. 당시 영암 지역에서는 지주와 마름들이 소작권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일이 잦아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과]

영암 지역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원래는 1932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 시위를 벌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로 실패하자 음력 5월 1일인 6월 4일 덕진면 영보리영보정에서 모여 노동절 기념식을 열었다. 지주의 횡포에 저항할 것을 결의한 이들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여 지주에게서 소작지를 옮겨 받은 신소작인들의 집을 찾아가 위협하는 한편,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은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처음에 구호를 외쳤던 장소인 형제봉의 이름을 따서 형제봉 사건이라고도 한다.

[결과]

일본 경찰은 사건 직후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 1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서 73명이 예심에 넘겨졌다. 주된 활동가 중 김판권, 유용희(柳龍羲), 곽명수(郭明洙) 등은 징역 5년에 처해지는 등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또 이들이 운영하던 야학도 모두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보정 사건 은 당시 소작농의 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한편,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영암 지역 중 덕진과 구림의 전통적인 사족 집단 출신으로, 영암 지역 내에서 이념적 지형의 변화 과정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규모 구속으로 운동의 추진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실제 농민 조합의 조직은 좌절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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