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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리 거창 신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895
한자 老松里居昌愼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이우당 -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302-1지도보기
문화재 영보정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6지도보기
성격 동성 마을
면적 3.996㎢
가구수 60가구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에 있는 거창 신씨 집성촌.

[개설]

영암의 거창 신씨(居昌愼氏)신수(愼脩)[?~1101]를 시조로 하고 신후경(愼後庚)을 입향조로 한다. 신후경이 전주 최씨 최덕지(崔德之)[1384~1455]의 사위로 덕진면 영보리에 입향하면서 영암 지역에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신희남(愼喜南)[1517~1591], 신천익(愼天翊)[1592~1661] 등 화려한 관력을 가진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에는 영암군 북이시면(北二始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류천리(柳泉里), 송외리(松外里), 송내리(松內里), 노노리(老老里), 홍암리(紅岩里), 부항리(夫項里), 신동리(新東里), 옥동리(玉洞里)가 병합되어 북일시면 노송리가 되었고, 1929년 북일시면이 덕진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덕진면 노송리가 되었다. 노송리라는 이름은 노노리의 노(老) 자와 송내리의 송(松)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신후경의 아들 신영명(愼榮命)[1451~1498)이 덕진면 영보리에 살다가 보성 선씨와 혼인하여, 15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지금의 노송리 송내 마을에 입향하였다. 이로써 영암 지방에서 동족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거창 신씨는 우찬성을 지낸 신이충(愼以衷)의 세 아들이 각각 파조(派祖)인 참판공파(參判公派), 서령공파(署令公派), 양간공파(襄簡公派) 등 세 개 파로 나뉜다. 영암의 거창 신씨는 참판공파 후손들이며, 신후경의 아들 신영수(愼榮壽)[1442~1497], 신영명(愼榮命), 그리고 신영명의 손자 신희남(愼喜男)[1517~1591]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영명은 1474년에 덕진면 송내 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247호 영암 이우당(靈巖二友堂)을 건립하여, 인근 사림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하게 하였다.

신희남은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고 있던 인물로 수찬, 사간을 거쳐 좌승지와 강원 감사를 역임한 뒤 귀향, 은거하면서 향론(鄕論)을 이끌었다. 신희남는 영암 지방의 향약 및 향안의 마련에 임구령(林九齡), 박규정(朴奎精), 이후백(李後白), 백광훈(白光勳) 등과 힘을 합쳤으며, 문하에서 남평 문씨 문익주(文益周)가 배출되었다.

거창 신씨는 조선 전기의 사족적 배경 아래 임진왜란 후에도 기반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특히 신천익(愼天翊)[1592~1661], 신해익(愼海翊)[1592~1616] 형제의 학행은 가문의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자연 환경]

노송리덕진면 영보리·영등리와 인접해 있다. 영암~광주 간 도로가 통과하며, 영암군청과도 가까운 거리다. 넓은 들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벼농사 등 농업을 위주로 하는 마을이다.

[현황]

영암에 살고 있는 거창 신씨는 2010년 조사 때 80여 가구, 2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덕진면 노송리에는 60가구, 영보리에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거창 신씨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영암 이우당 이외에, 덕진면 영보리 영보 마을에 신후경이 장인 최덕지와 함께 세운 전라남도 기념물 제104호인 영보정(永保亭)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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