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병교 영세불망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49
한자 金炳喬永世不忘碑
이칭/별칭 영암 모정리 김병교 영세불망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혜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01년 - 김병교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76년 - 김병교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17년 5월연표보기 - 김병교 영세불망비 건립
현 소재지 김병교 영세불망비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지도보기
성격 영세불망비
관련 인물 김병교
재질
크기(높이,너비,두께) 124㎝[높이]|24.5㎝[너비]|3㎝[두께]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김병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김병교(金炳喬)[1801~1876]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공기(公器)이다. 김이장(金履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태순(泰淳)이고, 아버지는 이조 판서 김교근(金敎根)이며, 어머니는 오재선(吳載選)의 딸이다.

김병교는 1851년(철종 2)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현감으로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이 되었다. 1853년에 이조 참판에 특진된 뒤에 수원 부유수와 대사성을 거쳐 1856년에는 전라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857년에 형조와 예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그해 대호군(大護軍)으로 산실청권초관(産室廳捲草官)과 안태사(安胎使)를 겸하였다.

1862년에 이르러 이조 판서, 좌참찬, 공조 판서를 지내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그 이듬해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잡자 사임하였다. 그러나 다시 흥선 대원군에 의해 중용되어 1864년(고종 1)에 형조 판서가 되고, 1868년에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도 공조 판서, 형조 판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 상호군(上護軍)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건립 경위]

김병교 영세불망비(金炳喬 永世不忘碑)는 관찰사 김병교를 기리기 위해 모정 마을 사람들이 1917년 5월에 세운 비석이다.

[위치]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모정 저수지 수문 옆 원풍정(願豊亭)의 뜰 한편에 서 있다.

[형태]

김병교 영세불망비는 철비(鐵碑)로서, 규모는 높이 124㎝, 너비 24.5㎝, 두께 3㎝이다.

[금석문]

비석에 앞면에는 ‘관찰사 김 공 병교 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炳喬永世不忘碑)’라 양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건립 시기와 건립 주체가 새겨져 있다.

[현황]

김병교 영세불망비는 비석의 마모가 심하지 않고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으며, ‘영암 모정리 김병교 영세불망비’로도 불린다.

[의의와 평가]

김병교 영세불망비는 조선 후기의 영향력 있는 문신이었던 김병교를 기리기 위해 모정 마을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자 김병교의 행적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