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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산성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09
한자 活城山城址
이칭/별칭 남 궁성산성 터,궁성산성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
집필자 고용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활성산성 터,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시행
소재지 활성산성 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한대리|금정면 연소리
성격 산성 터
지정 면적 약 1,500m[둘레]|10m[아래쪽 너비]|3.5m[위쪽 너비]|3~5m[높이]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한대리, 금정면 연소리의 경계인 활성산에 있는 산성 터.

[변천]

활성산성(活城山城)이 입지하고 있는 영암읍 일대는 삼국 시대 때부터 군현(郡縣)이 설치되어 운영되어 왔던 곳이다. 백제 때 월내군(月奈郡)[월나군]이었다가 통일 신라 때인 757년에 영암군(靈巖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성종(成宗)[960~997] 때는 일시 낭주 안남 도호부(郎州安南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는 영암군(靈巖郡)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후기 영암면(靈巖面)으로 개편된 후 1979년 영암읍으로 승격되어 201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활성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과 일제 강점기까지의 조사 기록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활성산성은 본래 궁성산성(弓城山城)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한자 ‘활 궁(弓)’ 자를 한글 ‘활’로 풀어쓴 이름이다. 따라서 금정면(金井面) 북쪽의 안노리와 나주시 봉황면 덕곡리의 경계 상에 위치한 궁성산성을 ‘북 궁성산성(北弓城山城)’이라 하고, 그보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활성산성을 ‘남 궁성산성(南弓城山城)’이라 하였다.

[위치]

활성산성 터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한대리, 금정면 연소리의 경계에 있는 활성산(活城山)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활성산성 터는 1986년에 목포 대학교 박물관의 지표 조사 때 존재가 확인되었고, 1999년에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을 작성할 때 다시 확인되었다. 활성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 및 배경은 알 수 없다.

[현황]

활성산성은 해발 498m의 활성산 정상부와 그 남사면의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성곽 안에 골짜기를 포함하여 산성을 축조하는 방식] 산성으로 북동-남서로 긴 장방형(長方形)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보여준다. 활성산성은 해발 498m 지점의 서북 벽 모서리를 최고점으로 하여 가장 낮은 남문지(南門址) 부근이 해발 425m 정도로서 서쪽과 북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이 낮은 북고 남저(北高南低) 형의 지형 상에 입지하고 있다. 영암 월출산뿐만 아니라 장흥과 강진 지역까지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나 전체적인 조망은 양호한 요충지를 이루고 있다.

성벽은 흑갈색 점토와 황갈색 마사토로 층층이 쌓은 판축(版築) 기법의 토성이다. 둘레 약 1,500m, 아래쪽 너비 10m, 위쪽 너비 3.5m, 높이 3~5m 가량으로 거의 원형에 가까운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과 서벽이 410m로 길고, 남벽과 북벽이 330m 내외로 짧은 형태이다. 성문지(城門址)는 동문·북문·남문 등 3개소가 남아 있으며, 3개소 모두 성벽 중간에 있다. 너비 3m 규모로서 판축 기법으로 축조된 성벽과는 달리 문지(門址)의 양 측벽을 할석재(割石材)를 이용하여 설치하였다. 특히 동문지(東門址)는 측벽 길이 5.5m, 높이 2.7m 가량의 석축(石築)과 성문을 고정하기 위한 문지도리석[문짝과 문설주를 잇는 문지도리가 꽂히는 돌]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또한 산성 내부에는 10여 개소의 건물지(建物址)도 확인되고 있으며, 이들 건물지와 성문지 주변에서 고려 시대 기와 조각 등이 집중적으로 수습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 목장의 초지를 조성할 때 청동 숟가락을 부장한 돌덧널무덤[石槨墓]이 확인되었다 한다.

[의의와 평가]

활성산성은 아래쪽 너비가 10m에 달하며, 기초부에 기단석열(基壇石列)을 두지 않고 순수 판축 기법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현재까지의 고고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판축 기법의 토성은 6세기 중후반의 삼국 시대까지를 하한으로 하고 있다. 활성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우나 일단 산성이 500m 정도의 높은 산에 입지하고 있고, 출토 유물 또한 고려 시대 기와 조각 등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나말 여초 때부터 고려 때까지의 순수 판축 기법으로 축조한 토성으로서 특이한 예에 속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드물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토성으로서, 영암군에 분포하고 있는 토성 가운데 금정면 마봉산성(馬峰山城)과 규모에서 차이를 보일 뿐 축조 기법 및 양상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상호 비교되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활성산성은 입지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장흥과 강진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감시·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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