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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량진 왜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58
한자 達梁鎭倭變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483년 2월연표보기 - 달량진 왜변 발생
전개 시기/일시 1522년 6월연표보기 - 달량진 왜변 재발
전개 시기/일시 1555년 5월 11일연표보기 - 달량진 왜변 재발
성격 왜변

[정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했던 달량진으로 왜구가 상륙하여 침탈했던 여러 사건.

[개설]

달량진은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으며 해남군과 완도군 달도(達島) 사이의 물목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의 수군진으로, 1406년(태종 6)에 이미 기록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빠른 시기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달량의 원래 지명은 달도였는데 완도의 달도와 구분하려고 ‘고달도(古達島)’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전기에 잠시 해남현에 속한 수군진이었다가 영암으로 이속되었다. 이러한 달량진에 왜구가 침탈한 사건, 곧 달량진 왜변은 1483년·1552년·1555년 세 차례 있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무렵 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세가 불안했다. 이를 틈타 왜구가 창궐하자 조선 전기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을 중심으로 각처에 수군진이 설치된다.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달량진 주변만 보면 완도에 마도진[나중에 강진으로 이속], 장흥에 회령진, 해남에 어란진, 진도에 남도진 등이 있었고, 1440년(세종 22)에는 전라 수영이 목포에서 우수영으로 옮겨 온다. 처음 설치된 수군진은 내륙 방어를 위하여 육지 안쪽에 있다가 왜구들이 서해안을 자주 침범하자 남쪽 해안으로 전진 배치가 되었다.

그런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에는 조선 정부가 무역 통제를 강화하고 일본에 대한 교역량을 줄이자, 일본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 등의 일본 서부 바닷가 주민들이 달량진을 침범하게 되었다.

[경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달량진 왜변의 내력이 자세히 전한다. 첫 번째는 1483년(성종 14) 2월 말, 왜선 여러 척이 달량진에 이르러 상선(商船)과 무명 50필, 쌀 30여 석을 약탈하고 3인을 살해하였다.

두 번째는 1522년(중종 17) 6월에 왜선 12척이 침입하였다. 왜인 80여 명은 깃발을 세우고 징과 북을 치면서 달량에 상륙하였다. 이에 달량진 수군이 화살과 포를 쏘니, 왜구들은 북쪽으로 물러가는 척하다가 이튿날 그중의 3인이 뒷산에 올라 “왜변이 일어났다.”라고 소리쳤다. 성안의 군사들이 놀라 넋이 나갔을 때 왜선이 다시 침입했다. 방어하는 조선 수군의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이번에는 진무(鎭撫)[조선 전기 군영에 두었던 군사 실무 담당 관직]가 “수영·병영의 군사가 곧 온다.”라고 소리쳤고 이에 왜적이 놀라 물러갔다. 병영은 왜인들이 물러간 지 닷새 후에야 나타났고 그나마도 적이 보이지 않자 그대로 퇴각해 버렸다. 그 결과 달량진에서 물러난 왜적은 장흥 회령포와 완도 가리포로 쳐들어가 그곳을 난도질하였다.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왜구들이 우리말을 모두 잘하고 징과 북을 치면서 침략한 수법으로 보아 보통 좀도둑의 소행은 아닌 듯하다며 불안해했다.

세 번째 침략은 ‘을묘왜변’ 또는 ‘달량진 사변’이라고 하는데, 1555년(명종 10) 5월 11일에 시작되었다. 달량진의 앞바다에 도착한 왜선은 70여 척에 왜구는 6천여 명에 이르렀다. 달량진을 점령하고 나서는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 남도포·금갑포, 완도 가리포, 강진 마도진, 장흥 회령포 외에 전라병영과 강진·장흥 등의 민가를 마구 분탕질했다. 왜구들은 아무것도 거칠 게 없자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질러 서남해안은 한순간에 화염으로 뒤덮였고 군량과 무기 등도 모조리 약탈당했다.

[결과]

조선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영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의 수급 100여 급을 베자 비로소 왜구들은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현재의 강진군 작천면과 강진읍 일대를 분탕질하고 바다로 나감으로써 달량진 왜변은 끝이 난다. 달아난 왜적들은 6월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성을 공격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상 방어를 소홀히 하다가 왜구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건들로 해양 방어 체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이후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아무런 왜구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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