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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2
한자 靈巖-傳統文化-永保
분야 지리/인문 지리,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선영란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있는 조선 후기 이래 영암의 대표적인 집성촌.

[개설]

영암의 대표적인 전통문화 마을 영보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속한 마을로, ‘영보 12동네’로 구성되어 있다. 영보 12동네는 내동, 서당동, 관곡, 참새굴[냉천], 노로동, 솔안, 홍암, 장동리, 운곡, 송석정, 선암, 세류정을 말한다.

이를 행정 구역 기준으로 보면, 서당동과 내동은 영보 1구, 관곡과 냉천은 영보 2구, 송석정은 운암 2구, 선암과 운곡은 운암 3구, 노로동은 노송 1구, 솔안은 노송 2구, 홍암은 노송 3구, 세류정은 벽계 1구, 장등은 영등 1구에 각각 속한다. 이들 행정 구역은 이들 외에 다른 자연 마을도 포함하고 있다. 즉 영보는 행정 구역 단위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자연 마을을 단위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내동, 운곡, 서당동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솔안과 노로동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영보 12동네로 구성된 영보는 15세기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가 내동에 입향한 이래로 그 뒤를 이어 거창 신씨남평 문씨(南平文氏)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영보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15~16세기 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17~18세기에는 다양한 향촌 활동을 추진하여 영암 향촌 사회에서 위상을 정립하고, 각 성씨별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영보는 조선 후기 동성 마을의 형성 배경과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역사 문화 마을이다.

[영보의 향촌 활동]

영보 사람들의 혈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향촌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30년(인조 8)에 존양사 사우를 건립했고, 1680년(숙종 6)에 존양사에 편액을 내려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686년에는 거창 신씨 족계를 결성했고, 1690년에 존양사 청금록을 작성하였으며, 1692년에 영보 동계를 중수했다. 1695년에 존양사에 김수항 추배가 있었고, 1702년과 1704년에 존양사 청액소를 하였다. 1711년에 존양사에 김창협을 추배하였으며, 1712년에도 존양사 청액 상소가 있었다. 1713년 존양사가 녹동 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1716년에 전주 최씨 문각인 합경당(合敬堂)을 건립하였으며 연촌 최덕지 영정을 봉안하였다. 1772년(영조 48)에 부상계(賻喪禊)를 설립하였고, 1796년(정조 20)에 송양사를 건립하였다.

한편 영보에는 영보동계(永保洞契)가 잘 남아 있다. 영보동계는 전주 최씨거창 신씨 등 혈연적인 유대를 바탕으로 설립되어 조선 후기까지도 유지되던 지역 공동체 조직이다. 현재 덕진면 영보리 전주 최씨 문중의 재실인 합경재(合敬齋)과 송산리 거창 신씨 문중 사우인 송양사(松陽祠)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1649년 이가식(李嘉植)의 중수 서문에서 밝혀지듯, 최덕지의 내외손을 중심으로 이미 결속되어 있던 구계(舊契)를 중수하는 형태였고, 기존의 조약들이 시의에 맞지 않거나 너무 번잡하고 소홀한 면이 있어 시행 상 무리[분쟁 및 규제 해이]가 있기 때문에 다시 중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정에 대하여 1778년(정조 2)의 「영보동약」 중수 시 그 서문을 썼던 신철흥(申哲興)은 영보정 동계[동약]의 연혁을 비교적 소상하게 정리하고 있다.

영보정 동계는 1550년(명종 5)에 연촌 최덕지의 내외손들이 만든 목족계(睦族契)가 선행 형태이며, 이를 토대로 동계가 마련된 바[1649년 영보동계헌 중수], 이 또한 100여 년이 경과하자 수정이 불가피해져 신유우(慎惟愚)에 의해 동계 중수가 이루어졌다 한다. 그런데 이 신유우에 의한 중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데, 즉 신유우는 1752년 동계 중수와 1755년 동약의 서문을 모두 작성하였고 이를 통하여 동계와 동약이 서로 이중적인 구조로 실시되고 있었음이 추적되어 주목된다. 신유우는 1752년의 동계 중수 서문에서 영보동계는 족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후손이 번창하자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친족들 간에 상부상조의 규약이 마련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고, 곧 이은 1755년의 동약의 서문에서는 옛날 향약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약의 결속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 두 조직은 영보촌의 향촌 조직으로서 서로 병렬적인 모습이다. 현재 구성원 명단이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전체 동민을 포괄하는 조직이 동약[1755]이고, 사족 결사체적인 유대를 가진 동족계가 1752년의 동계였다고 보인다. 즉 그 하나는 과거의 족계 전통을 잇는 부상계(賻喪契)이고, 다른 하나는 촌락 공동체적 범위를 갖는 동약이었다.

이들 조직은 이후 새로운 형태로 이분되었다. 1772년 부상계의 서문을 보면 이 계는 영보동계가 계원수의 계속적인 증가와 지출 경비의 증대로 인하여 본래의 상장부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영보동계에서 10석을 내고, 동이 각계에서 20석을 출연하여 이를 80여 량의 돈으로 바꿔 상장부조의 기능만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이 각 계는 사족계와는 다른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조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밖의 촌락의 여러 일에 관한 동계의 기능은 1778년의 영보동약[중수 서문]에서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보에 남아 있는 전주 최씨 문중 유적]

영보전주 최씨거창 신씨 그리고 남평 문씨가 중요한 친족 집단으로서 세거하고 있다. 이 중 정자 영보정을 비롯한 전주 최씨 문중의 중요한 상징물은 주로 내동에 위치해 있다. 영보에 남아 있는 전주 최씨 문화 유적으로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80호인 영보정(永保亭), 존양루, 목판각(木板閣), 최연창 가옥, 보물 제594호인 최덕지 영정(崔德之影幀) 및 유지 초본(油紙 草本), 중요 민속 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된 최성호 가옥, 전라남도 지정 보호수[15-15-2-1]인 수령 400년 된 영보리 용나무[소나무] 등이 있다.

이 중 영보정은 구림의 회사정, 장암의 장암정과 함께 영암군의 대표적인 정자이며, 향약을 집행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영보정 앞에는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비석도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영보정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진다. 이러한 주변적 조건들은 영보정의 권위를 나타내며, 영보정영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고 있다.

영보정을 지나면 전주 최씨의 재실인 합경재와 영당(影堂)이 나온다. 합경재의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주차장으로도 이용되는 넓은 안마당에는 비석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합경재는 전주 최씨들의 문중 행사장으로도 이용된다. 문중 회의를 할 때나 복달음 행사를 할 때, 그리고 영당 제사를 모실 때 문중 사람들은 합경재에 모인다. 전주 최씨들의 문집과 각종 기록물은 합경재에 보관되어 있다.

합경재의 뒤편에는 보물 제594호로 지정된 최덕지의 영정과 유지 초본을 모신 영당이 있다. 최덕지영보전주 최씨들에게 가장 신성한 것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합경재의 좌측에는 판각(板閣)이 있다. 이 판각은 『연촌 유사』, 『산당집』, 『문곡집』 등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전주 최씨들이 선조의 학문적 업적을 드러낼 때, 이 판각이 주로 이용된다. 이 목판과 영정은 원래 녹동 서원에 있던 것으로 흥선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합경재로 옮겼다고 한다.

합경재를 지나면 전주 최씨 종손이 살고 있는 집에 존양루(存養樓)가 있다. 존양루연촌 최덕지가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 존양루의 현판은 안평 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누각 안에는 최덕지에게 보낸 이별시를 적은 편액과 최덕지가 지은 글을 담은 편액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최덕지가 낙향한 15세기 중엽에 처음 지어진 존양루최덕지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건축물로서 연촌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내동 마을에는 중요 민속 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된 최성호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전주 최씨거창 신씨 양 문중에 매우 중요한 가옥이다. 이 가옥을 거창 신씨들은 산정(山亭)이라고 한다. 원래 이 가옥은 전주 최씨 소유였으나, 신후경이 영보에 정착한 후 처가로부터 물려받아 이곳에 거주하다가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산정’은 집의 이름인 동시에 입향조인 신후경의 장남의 호이기도 하다. 즉 신후경의 장남이 산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를 산정이라고 하였다. 산정전주 최씨거창 신씨들이 사족을 형성하여 향촌을 지배하던 당시 마을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향약의 집행 장소이기도 하여 영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약 200년 전 거창 신씨들은 이 집을 전주 최씨들에게 되팔아 지금은 최성호 가옥으로 명명되어 있다.

[영보에 남아 있는 거창 신씨 문중 유적]

거창 신씨들의 문중 상징물은 주로 솔안에 있다. 솔안으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에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가운데 들어서면 송양사가 나온다. 송양사송양 서원이라고도 하며, 거창 신씨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송양사 앞 마당에는 송양사에 모신 다섯 현조의 행적을 적은 비석이 여섯 기 배치되어 있으며, 사우 안 곳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송양사에는 건물이 세 동 있다. 맨 앞의 건물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친족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다. 두 번째 건물은 이우당(二友堂)으로서 입향조 신후경의 차남이 거처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이우당의 손자는 한석봉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영계 신희남이며, 신희남이우당에서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신희남거창 신씨의 학문적 명성을 나타낸 조상으로 송양사에 모셔진 다섯 조상 중 한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이우당거창 신씨들에게 중요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송양사의 맨 뒤에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신후경의 부친인 경재공(景齋公), 신후경의 장남인 산정공(山亭公), 신후경의 증손인 영계공(瀯溪公), 영계공의 증손인 소은공(素隱公) 신천익(愼天翊)호산공(湖山公) 신해익(愼海翊)이 모셔져 있다. 이 다섯 조상은 거창 신씨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영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유산들은 이 다섯 조상과 연계되어 있다.

[영보의 연중 행사]

영보 마을에서는 연중 조상 및 친족 집단과 관련된 대규모 행사가 진행된다. 음력 정월에는 전주 최씨거창 신씨의 문중 회의가 열린다. 문중 회의는 1년에 한 번 연리는 문중 정기 총회로서 타지에 출타한 인사들까지 참가하고 있다. 음력 4월 5일에는 녹동 서원 제향이 열린다. 녹동 서원에는 연촌을 비롯하여 그의 손자인 산당 최충성, 문곡 김수항, 농암 김창협 네 사람을 모신 서원으로서, 모셔진 네 사람은 영암 지역에서 대유학으로 추앙되고 있다. 녹동 서원 제향은 영암의 유림에서 제를 모시지만, 경비는 주로 전주 최씨 문중에서 맡고 있다.

양력 5월 5일에는 풍향제(豊鄕祭)가 열린다. 풍향제는 1979년 5월 5일 제1회 행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면 단위 향토 행사이다. 한국 방송 공사(KBS)가 정한 전국 100대 지방 축제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일명 ‘영보의 날’, 또는 ‘고향 방문일’이라고도 한다. 풍향제는 영보 출신으로서 외지에 나간 출향 인사들이 고향을 방문하는 날로서 마을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하루를 즐거운 잔치 마당으로 만든다. 풍향제는 형식상 영보라는 지역의 축제이지만 행사의 책임자는 전주 최씨거창 신씨가 교대로 맡아왔다. 또한 준비도 이 두 친족 집단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으며, 방문하는 출향 인사들도 대부분 이 두 친족 성원으로서 내용상으로는 전주 최씨거창 신씨가 주도하는 ‘친족 집단’의 축제이다.

영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열리는 영정 제향과 송향 서원 제향이라고 할 수 있다. 10월 초정일은 시제를 모시는 가장 좋은 날로 인식되어 전주 최씨거창 신씨 모두 이 날에 가장 중요한 문중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정 제향은 영당에 모셔진 연촌의 영정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서 전주 최씨 연촌공파 최대의 기념일이다. 송향 서원 제향은 송향 서원에 모셔진 다섯 조상을 모시는 거창 신씨 최대의 기념일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제를 모시기 때문에 영정 제향과 송향 서원 제향은 암묵적으로 비교되면서 경쟁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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