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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472
이칭/별칭 쓰래,써리,써으리,써그레,성으리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헌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쟁기로 갈아놓은 논밭의 흙덩이를 잘게 부수거나 땅바닥을 판판하게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

[개설]

써레 는 쟁기로 갈아놓은 논밭의 흙덩이[쟁깃밥]를 잘게 부수거나 바닥을 판판하게 고르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를 말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논에서 쓰는 것을 ‘무논써레’, 밭에서 쓰는 것을 ‘밭 써레’ 또는 ‘마른써레’라 하여 두 가지로 쓴다. 무논써레는 쟁기로 갈아놓은 논을 모내기 전에 물을 대고 흙덩이를 부수고 평평하게 고르는 데 쓴다. 밭 써레[마른써레]는 써렛발이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아이들이 올라타 소가 끌도록 하여, 덩어리진 밭의 흙이 깨뜨려지도록 한다. 또 예전에는 써레의 손잡이와 나루채를 빼고 써레 몸체에 봇줄만 매어 사람이 써레에 올라타고 써레질을 하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써레 는 지역에 따라 쓰래[경기도 덕적], 써리[경상남도 영산], 써으리[전라남도 영광], 써그레[강원도 도계], 성으리 등이라 불렸다. 영암 지역에서는 써레라 불렀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써흐리, 『해동농서(海東農書)』에는 ‘써으래’라 했다. 한자음으로는 『농사직설(農事直說)』·『산림경제(山林經濟)』·『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소흘라(所訖羅), 『고사 신서(攷事新書)』에는 서해라(鋤解羅)라고 썼다. 그리고 한문으로는 『해동 농서』에 초(耖), 『농사직설』·『색경(穡經)』·『산림경제』에는 목작(木斫)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써레는 적어도 조선 초 이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즈음에도 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는 아직 써레를 쓰고 있는 곳이 있지만 대부분은 경운기나 트랙터의 로터리를 이용한다.

[형태]

써레 는 잘 터지지 않게 길이가 1~1.5m 되는 향나무나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몸체를 만들었으나 영암 지역에서는 보통 소나무를 썼다. 이 몸체에 20~30㎝ 되는 말뚝같이 깎은 둥글고 끝이 뾰족한 써렛발 6~10개를 땅으로 향하게 빗살처럼 나란히 꽂아 박았다. 이 써렛발은 밤나무·참나무·박달나무같이 단단한 나무를 깎아 쓰지만, 흙에 걸려 곧잘 부러지기 때문에 여러 개의 여벌을 준비하였다가 그때그때 고쳐 박아야 했다. 그래서 윷을 놀다가 상대의 말이 ‘도밭’하고 ‘겉밭’에 있는데 개를 쳐서 부치든지 하면 ‘써렛발을 고친다’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써레 몸체 양 끝에서 3~4번째의 써렛발 사이 위쪽으로는 ‘직살’ 또는 ‘찍게발’이라는 긴 나무막대 두 개를 박아 손잡이[가로 막대]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몸체 앞면 양쪽에 앞으로 뻗어 나오도록 긴 나무를 박고 봇줄을 매어 소의 멍에에 잡아맬 수 있게 했는데 이를 ‘나루채’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봇줄을 매지 않고 양 나루채 자체가 소의 멍에까지 이르도록 길게 만든 것을 쓰기도 했다.

한편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옹이진 참나무 자연목 6~7개로 바닥을 만들거나, 옹이가 없으면 따로 발을 만들어 끼워 소가 끌게 하였고, 어른이나 어린아이가 타거나 큰 돌을 얹어 쓰기도 했는데 이것을 ‘공이써레’라 했다. 써레의 무게는 보통 10㎏ 내외로 소 한 마리와 남자 한 명이 하루에 2,000평[6,611.57㎡]의 논을 썰 수 있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암 지역에서는 예전에 써레질이 끝나면 논농사의 중요한 고비 하나를 넘긴 셈이었으므로 ‘써레시침’[써레씻이·써레수세]이라 하여 음식과 술을 장만해 농악을 치면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즉 5월경에 모내기를 하는 동안 사용하였던 써레를 보관하기 위해 깨끗이 씻어 두는데, 써레를 씻는다는 것은 주곡인 벼농사의 수확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이날은 모내기에 애를 쓴 머슴들에게 주인집에서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을 하고 돈도 주어 며칠 쉬게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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