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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 여사 추모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351
한자 德津女史追慕祭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행사/행사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내촌길 15-3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상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기록 시작 시기/일시 1973년 5월 - 『덕진 여사 제형록』에 덕진 여사 추모제 헌관 선정에 관하여 기록
의례 장소 덕송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179-1지도보기
성격 추모제
의례 시기/일시 단오 [음력 5월5일] 오전 열 시 반
신당/신체 제각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에서 매년 단오절에 덕진의 공덕을 기리고자 지내는 추모제.

[개설]

덕진(德津)은 통일 신라 때 사람으로, 지금의 영암읍덕진면을 경계로 하는 영암천 냇가에서 주막집을 하면서 영암천을 건너는 행인들이 불편을 피할 수 있도록 하려고,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두고 푼푼이 모아 온 개인 재산으로 돌다리인 대석교(大石橋)를 창건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공덕을 기리고자 매년 단오절[음력 5월 5일]에 대석교 창주 덕진 공덕 보존회(大石橋創主德津功德保存會)[이하 ‘보존회’]가 주관하여 덕진면민의 행사로서 여는 것이 바로 덕진 여사 추모제이다. 이 행사에서는 덕진면장이 제관 중 첫잔을 올리는 초헌관이 되어 봉행한다.

덕진 여사 추모제 를 봉행하는 제각은 덕진면 덕진리에 있는 덕송재(德送齋)이다. 덕송재가 건립된 장소는 통일 신라 때에 덕진이 주막집을 하였던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덕진면은 조선 정조(正祖) 때 발행한 『호구 총수(戶口總數)』를 보면 영암읍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일시면(北一始面)이라 하였고 덕진리는 북일시면의 중심 지역으로 안모실이라 하였다. 행정 구역 통폐합이 진행된 1914년에 덕진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덕진리가 되었고 1929년 면 명칭 변경 때에는 덕진리가 면소재지가 되어 덕진면이 되었다.

1. 덕진에 대한 전설

덕진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고증된 것이나 문헌에 나타난 것은 없으나 영암 지역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말을 따르면, 통일 신라 후기 때 사람이며 월출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영암읍을 감싸고 서해로 흘러가는 영암천의 기슭에서 주막집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으로 치면 영암·해남·강진 등 남해안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주 등지로 왕래하는 큰 길목으로, 장사꾼이나 여행객들이 특히 많이 통행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거나 바닷물이 밀물일 때에는 영암천을 건널 수가 없어 며칠씩 기다리거나 급한 마음에 영암천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러한 광경을 보아 온 덕진은 이곳에 다리를 놓아 행인들의 불편을 덜어 줄 것을 결심하고 주막을 찾아온 행인들에게 “이곳에 다리를 놓으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갈 것 같소?”라고 물어 보니 “족히 삼백 냥은 있어야 할 것이요.”라고 하여, 이때부터 항아리를 땅에 묻어 두고 남몰래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왔으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새로 부임한 태수의 꿈에 소복을 한 덕진이 나타나 앞뒤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서 “제 주막집에서 동쪽으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삼백 냥을 항아리에 담아 묻어 두었으니 그 돈을 파내어 제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라 간청하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태수는 이를 이상히 여겨 군역을 시켜 그 여인이 말하였던 지점을 파 보니 과연 삼백 냥이라는 큰돈이 나왔고, 태수는 1,000척(尺)이나 되는 돌다리를 설치하고 덕진의 이름을 따서 다리 이름을 덕진 다리라 하였다 한다.

2. 추모제

덕진 여사 추모제 를 봉행한 최초의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는 없으나 일제 강점기 말 이전과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매년 단오절 새벽녘에 영암천 냇가 모래밭[‘모래 바탕’]에서 추모제를 모셨다고 한다. 굳이 새벽녘을 택한 이유는 영암천이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고 해수욕장같이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어 단오절이면 인근 군 주민 및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래찜질을 하려고 많이 운집하기에 이를 피하고자 새벽녘에 모셨다.

『덕진 여사 제향록(德津女史祭亨祿)』을 보면, 1973년부터 초헌관·아헌관·종헌관·축관·집례·집사 2인 등 제사를 지내는 데에 필요한 제관들을 선정하여 추모제를 봉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보존회장 조옥현에 따르면, 이때부터 덕진면장이 초헌관이 되어 추모제를 봉행하였고 영산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영암천 냇가 모래밭이 간척되자 덕진 다리가 있었던 영안천의 둑 가까이에 제단을 만들고 추모제를 봉행하였다고 한다.

덕진 여사 추모제 의 초헌관은 덕진면장이 맡아 왔으나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은 영암군수가 초헌관으로 참석하였다. 이 사실로 보건대 이 시기에 덕송재와 전망대의 건립이 논의되어 건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덕진 여사 추모제 에 소요되는 경비는 1973년부터 1985년까지는 지역 기관 단체장 및 유지들의 찬조로 봉행한 것으로 보이며, 1986년부터 덕진면장이 처음으로 제물 대금 10만 원을 찬조한 것으로 보아 1990년까지는 면사무소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1991년에는 당시의 영암군수가 참석하여 10만 원을 찬조하였고 1992년부터는 처음으로 영암군에서 30만 원이 지원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영암군 지원금으로 추모제를 봉행한 것으로 보인다. 2012년도에는 300만 원이 지원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1.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일명 ‘덕진비’]는 1813년(순종 13년) 덕진의 공덕을 길이 남기고자 덕진 다리 가까이에 마을 주민들이 세웠다. 외딴곳에 서 있는 덕진비를 보존하려고 옛 면사무소 옆으로 이전하였으나, 비는 본래의 위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1983년 5월 5일 덕진비 이설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본래의 위치로 옮겨 세웠고 1992년 1월에는 비의 마모와 훼손을 막고자 비각을 세웠다.

2. 덕송재

덕진 여사 추모제 를 봉행하는 덕송재는 대지 면적 821㎡[248평], 제각 면적은 75.24㎡[23평]으로,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축복하는 상량문(上樑文)에는 2003년인 단기(檀紀) 4336년 계미(癸未) 4월 19일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짝지붕을 하고 있다. 중앙 두 칸은 제실로, 덕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좌측과 우측 각각 한 칸은 제수 용품 등을 보관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각 정면에는 예서체(隸書體)로 ‘덕송재’라고 양각된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약 100여 평[330.59㎡]에 달하는 뜰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3. 영정

덕진의 영정은 항아리를 안고 있는 여인상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80㎝, 가로 160㎝로 덕송재 중앙에 봉안되어 있다.

[절차]

추모제는 1부와 2부로 진행되는데 1부는 추모제 봉행, 2부는 기념식으로 진행된다.

1. 추모제 준비

1) 제관 선정

제관은 제삿날 열흘 전에 보존회에서 제관을 선정한다. 초헌관은 덕진면장이 되고 아헌관·종헌관·집례·축관·집사 2인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에게는 추모제 이레 이전까지 추모제 제관으로 참여해 달라는 뜻의 요청서인 망장(望狀)을 보낸다. 망장을 받은 제관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추모제에 참여한다.

2) 초청장 발송

초청장은 덕진면장과 보존회장의 명의로 발송되는데, 군 단위 기관장, 면 단위 기관장, 지방 유지 등 약 200명에게 발송된다.

3) 축문 작성 및 제물 준비

축문은 추모제 이틀 전까지 보존회에서 작성한다. 제물은 보존회에서 정한 회원의 집에서 마련하는데 어류는 조기·숭어·홍어·낙지, 육류는 돼지머리·쇠고기·닭고기, 나물류는 고사리·도라지·숙주나물·콩나물, 과일류는 대추·밤·곶감·배·사과·참외·수박, 떡은 백설기·찹쌀부꾸미, 탕은 육탕·소탕·어탕, 전류는 쇠고기전·명태전, 포류는 문어·명태·육포, 기타로는 꼬막·묵·새우 등으로 한다.

4) 제각 청소 및 행사장 준비

추모제 하루 전까지 제각 및 주변을 청소하고 제각의 창호를 다시 바른다. 제복을 세탁하고 제상·제기·병풍·돗자리·세숫대야·수건·주전자 등 제수 용품을 준비하고 내빈용 의자와 앰프 등 행사에 필요한 비품을 비치한다. 추모제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제각 및 면소재지에 내붙인다.

2. 추모제 진행

1) 추모제 봉행

단오절 오전 열 시 무렵 덕송재 안에 있는 덕진의 영정 하단에 제상을 마련하고 제물을 차린 후 향로에 향을 피운다. 제상은 조율시이(棗栗柹梨)로 차리고 메는 쌀밥으로, 제주는 청주를 사용한다. 군·면 단위 기관장 및 초청 인사가 도착하면 열 시 반 무렵에 덕송재 앞뜰에 마련한 기념식장에서 추모제를 봉행한다.

추모 제례는 유교식으로 거행한다. 제관은 검정색의 제복을 입고 제관을 쓰고 집례자의 홀기(笏記)[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에 따라 분향, 강신, 참신, 초헌관 헌작, 축관의 독축, 아헌관 헌작, 종헌관 헌작, 삽시, 헌다 등의 순으로 제례를 약 30분간 진행한다.

2) 기념식

추모제 봉행이 끝나면 바로 덕진면사무소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한다. 참석 내빈은 군수, 군 의회 의장 및 의원, 군 단위 기관장 및 면 단위 기관장, 지역 유지, 면민 약 200여 명이 참석한다. 기념식은 면사무소 직원의 사회로 진행되어 내빈 소개, 개식 선언, 국민의례, 경과보고, 추모사, 축사 순으로 이어지며 경과보고는 보존회 부회장이, 추모사는 보존회 회장이, 축사는 군수와 군 의회 의장이 하며, 축사가 끝나면 의식을 마무리하고 오찬장으로 이동한다. 오찬은 인근 식당을 정하여 하고 오찬이 끝나면 산회한다.

[축문]

축문은 초헌관이 잔을 올리는 헌작을 하고 나서 축관이 독축을 한다. 한문 축문을 사용하는데, 기본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단기 몇 년 음력 5월 5일에 덕진면장 아무개가 돌다리를 만들어 주신 덕진님의 신위 앞에 엎드려 감히 아뢰옵니다[維檀君紀元幾年歲次干支五月干支朔初五日干支 德津面長某敢昭告于 石橋創主德津之位伏以].”로 시작하여 제를 올리는 날짜와 제관 이름을 밝힌다. 이어서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돌다리를 세워 큰 내를 건너게 하는 데에 오래 남을 공을 세우셨으니, 우리 후세 사람들은 그 덕행을 잊지 못하여 천중절을 맞아 맑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진열하고 공경스럽게 잔을 올리니 맛보시기 바랍니다[傾産不惜架成石梁利涉大川千秋遺功惟我后人敢不忘德 玆値天中謹以淸酌庶羞敬神尊獻尙饗].”로 마무리한다.

[현황]

덕진 여사 추모제 덕진면사무소와 대석교 창주 덕진 공덕 보존회가 주관하여 매년 단오절에 덕진 여사의 공덕심을 찬양하고 면민들의 단합과 안녕을 도모하려는, 덕진면을 대표하는 행사이다. 이 추모제를 계승·발전시키고자 영암군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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