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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031
한자 沈南一
이칭/별칭 심수택(沈守澤),덕홍(德弘)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윤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 2월 10일연표보기 - 심남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1월 1일 - 심남일 을사늑약 체결 후 함평에서 의병 거사
몰년 시기/일시 1910년 10월 4일연표보기 - 심남일 순국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신남일,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심남일 출생지 -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
기념비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1-1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심남일(沈南一)[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 자가 남일(南一)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여, 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 부대를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秋風將卒泣相離]

고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古引山前馬去遲]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一掃腥塵終有一]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草違三載死生期]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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