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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17
한자 烽燧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고용규

[정의]

조선 시대 전라남도 영암군 해안 지역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는 밤에는 횃불[烽]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燧]로써 변경의 위급을 중앙에 전달하던 통신 수단으로 이를 봉화, 봉수대, 봉화대 등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봉수제는 기록상 12세기 중반의 1149년(의종 3)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曹晉若)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나타난다. 여기서 봉수의 격식이 규정되어 야화(夜火)와 주연(晝烟)으로 구분하였으며, 적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 지역과 해안 지방의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서 거화 수를 정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것을 바탕으로 하고 중국의 봉수제를 참고로 하여 체계적인 봉수 제도를 확립하였다. 특히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대의 시설 기준, 봉군(烽軍)의 신분과 봉화의 홰의 수를 새로 정하였으며, 봉수의 노선을 5개로 나누어 정하는 등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446년(세종 28)에는 봉수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1447년 3월에는 연변 연대(沿邊煙臺)와 복리 봉화(腹裏烽火)[내지 봉화(內地烽燧)]를 동시에 설치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르면 연변 봉수(沿邊烽燧)의 연대는 높이는 7.8m[25척], 둘레는 약 21.8m[70척], 직경 6.95m, 연대 밑의 사면은 9.1m[30척]으로 하고, 외부의 참호(塹濠) 깊이와 넓이는 각기 3.1m[10척], 둘레는 약 100m로 하고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게 하였다. 또, 갱참(坑塹)[깊고 길게 파 놓은 구덩이]의 외면에 길이 0.91m[3척]의 나무 말뚝을 껍질을 깎아 버리고 위를 뾰족하게 하여 땅에 심고 넓이는 3.1m[10척]이 되게 하였다. 연대 위에는 가옥(假屋)을 만들어 병기와 아침저녁으로 사용하는 물과 불을 담는 그릇 등 물건을 간수하게 하였다. 망보는 사람은 10일 동안에 서로 번갈아 이를 지키게 하고, 새로 온 사람과 그전에 있던 사람 사이에 양식이 떨어질 때에는, 해당 고을 관원과 감사(監司)와 절제사가 적당히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의 봉수 제도는 노선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구분하고, 성격에 따라 다시 경봉수(京烽燧), 내지 봉수(內地烽燧), 연변 봉수(沿邊烽燧)로 구분하며, 이 밖에 연변 지역에서 수군진이나 각 고을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 운영한 권설 봉수(權設烽燧)가 있었다. 전국 5개 노선의 직봉과 간봉을 합쳐 623개소에 달했는데, 이 중 제5거(炬)는 순천 돌산도 봉수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해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 봉수로 이어지는 노선이다. 전라남도를 통과하는 구간의 직봉 봉수는, 여수 돌산도 봉수→백야산 봉수→고흥 팔령산 봉수→마복산 봉수→천등산 봉수→장기산 봉수→보성 전일산 봉수→장흥 천관산 봉수→강진 거차산 봉수→해남 좌곡산 봉수→영암[현재 해남] 갈두산 봉수→화산 봉수→진도 첨찰산 봉수→해남 황원 봉수→목포 유달산 봉수→무안 군산 봉수→고림산 봉수→옹산 봉수→해제 봉수→영광 차음산 봉수→고도도 봉수→홍농산 봉수이다.

[내용]

조선 시대의 영암군은 오늘날과 달리 서남 해안의 바다를 끼고 있었다.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의 북평향(北平鄕)과 해남군 송지면의 송지부곡(松旨部曲)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고, 이들 지역에는 달량진(達梁鎭)·이진진(梨津鎭) 등 2개의 수군진과 갈두산 봉수(葛頭山 烽燧)·달마산 봉수(達磨山 烽燧) 등 2개의 봉수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 시설은 모두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 시설이다. 조선 전기의 갈두산 봉수와 후기의 달마산 봉수는 모두 제 5거 연변 봉수에 해당한다.

갈두산 봉수는 동쪽의 강진현 좌곡산 봉수[해남군 북일면 내동리 원동마을 봉대산]에서 연락받아 서쪽의 화산 봉수[후에 관두산 봉수로 위치가 바뀜]로 전달하는 자리였다. 갈두산 봉수가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영암군 달량진갈두산 봉수어란진→해남현 화산 봉수 및 관두산 봉수의 순서로 분포하고 있었다. 갈두산 봉수는 이들 수군진과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운영되었을 것이다. 갈두산 봉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부터는 기록에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 사이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달마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달마산 봉수는 완도(莞島) 봉수[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 숙승봉]로부터 연락받아 관두산 봉수[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두산]에 전달하던 연변 봉수였다. 제5거 직봉(直烽) 노선으로서, 『영암군 읍지(靈巖郡邑誌)』에 의하면 오장 12명, 봉군 20명 등 총 32명의 봉수군이 소속되어 있었다. 달마산 봉수갈두산 봉수 대신 그 기능을 하였던 점과 수군진과의 밀접한 관계 등으로 보아 이진진이 설치되는 17세기 중반 무렵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95년에 폐지되었다. 달마산 봉수가 운영되고 있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영암군 이진진달마산 봉수어란진→해남현 관두산 봉수의 순서로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달마산 봉수는 동쪽의 이진진어란진 사이에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운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갈두산 봉수는 육지부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 마을 해발 109.6m의 사자봉 정상부에 위치한다. 갈두산 봉수는 1985년 조사 당시 연대는 1~2단 정도의 석축 흔적만이 남아 있었을 뿐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그 후 파괴되어 있던 연대는 전망대 앞쪽에 막돌을 이용하여 직경 4.5m의 원형(圓形)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마산 봉수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해발 481m의 달마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연대는 산 정상부의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1985년 조사 당시의 규모는 현재 높이 3m, 상부 직경 4.3m, 하부 직경 15m로 파악되었다. 현재 봉수의 하단부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위부분의 원형 석축 연대는 후에 복원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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