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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인민 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75
한자 靈巖人民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기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5년 9월연표보기 - 영암 인민 위원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6년 2월연표보기 - 영암 인민 위원회 해체
성격 정치 단체

[정의]

1945년 9월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민간 자치 기구.

[개설]

1945년 8월 광복 직후 좌우익이 함께 참여했던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 우익이 탈퇴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은 건국 준비 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해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의 건국 준비 위원회 지회들은 지역별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는데, 영암도 영암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다. 1945년 9월 개편된 영암 인민 위원회는 지역 자치 기구로 1946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설립 목적]

인민 공화국 중앙 인민 위원회는 그 정강과 시정 방침에서 자주적 독립 국가, 일제와 봉건 잔재 일소, 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내세우면서 일제 및 민족 반역자 토지의 몰수와 분배, 소작료 3할제 등을 주장하였다. 이런 방침은 영암 인민 위원회에서도 대체로 유지되었다.

[변천]

우익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인민 위원회가 불일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암에서는 그대로 승계되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영암 지부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었던 조극환, 고재섭이 영암 인민 위원회에서도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았고, 조덕환이 보안서장을, 임병남이 부서장을 맡았다.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에 영암 대표로 참가했던 이창희, 최상호,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에 영암 대표로 참가했던 곽인섭, 유근욱, 최형동, 그리고 최규문, 문학연, 김필재 등이 영암 인민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45년 말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지방 인민 위원회의 활동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1월 초순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55보병 중대에서 미군 15명을 영암에 파견하자, 우익이 세를 확대하며 영암 인민 위원회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2월 미군정은 조극환과 조덕환을 정권 탈취와 불법 테러 혐의로 구속하고, 유성계와 조규보를 새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영암 인민 위원회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으며, 영암 지역 좌익들은 주로 조극환의 조카인 조사원이 이끄는 영암 농민 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암 인민 위원회는 교육과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공회당에서 연극 공연을 통해 주민들을 계몽하고 정치의식을 고무했으며 향토 학교를 열어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학습회, 강습회 등을 자주 열어 인민 위원회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고, 조극한이 초대 영암군수로, 조덕환이 경찰서장으로 선출되었다. 행정·경찰 기구를 구성한 이들은 스스로 적산을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주민 자치를 지속하였으나 미군정이 인민 공화국과 각지 인민 위원회를 전면 부정하고 관계자들을 구속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인민 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양상은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영암 인민 위원회3·1 운동광주 학생 운동, 농민 운동 등에 참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비교적 지역민들의 지지를 쉽게 얻고 자치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 전선 형성에 실패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본격적으로 탄압을 가하자 급속히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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