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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006
한자 東亞細亞文化交流-象徵-王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강봉룡이강욱

[개설]

왕인(王仁)은 고대 일본[왜]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백제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문자와 학문을 수용하여 이를 일본에 전파한 문화 선각자이자,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와 같은 일본 고대 사서에서는 왕인의 문화 전파자로서의 공적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면서 일본 학문의 시조[書首]로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 사서에서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왕인에 관한 한 전적으로 일본 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정작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왕인의 국내 활동상에 대한 정보, 예컨대 왕인의 출생지나 성장과 학문 연마의 과정, 그리고 도일(渡日)의 루트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영암 군서면구림 마을왕인의 탄생과 도일에 이르는 설화가 전하고 있어서, 왕인의 행적을 추적할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구림 마을에 전하는 왕인 설화]

구림 마을은 영암 월출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동쪽에는 영산강 하구로 곧바로 흘러들어가는 영산강의 마지막 지류 영암천이 자리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룬다. 이곳은 상대포(上臺浦)라는 유력한 국제 포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왕인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저명하다. 왕인 설화는 왕인의 탄생, 성장과 학문의 과정, 그리고 도일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이야기가 구체적인 지명이나 사물 등과 결부되어 전하고 있어서, 단편적인 예사 설화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구림의 별칭인 성기동(聖起洞)왕인의 성스러운 탄생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월출산 자락에 위치한 책굴(冊窟)이라 불리는 자연 석굴은 왕인이 학문에 정진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책굴 바로 앞에 구림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석상은 왕인 석상이라 전하고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양사재(養士齋)왕인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포는 후에 왕인이 일본으로 떠난 곳이며, 상대포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돌정 고개왕인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별의 아쉬움을 표한 곳이라고 한다.

우리의 문헌 자료에는 전무한 왕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처럼 구체성을 띠면서 구림에 전해 온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인에 대한 어떠한 설화도 구림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이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는 바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하다는 점, 더욱이 그 설화가 조선 시대까지 어떠한 사서나 지리서에서도 채록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설화가 처음 기록된 것은 일제시기인 1930년대에 편찬된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의 성기동 조에서 “백제 고이왕 대에 왕인이 여기에서 탄생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구림 마을왕인 설화는 예부터 전해져 온 것이 아니라 1930년대에 『조선 환여승람』의 편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설화를 조작한 동기가 확인되지 않고, 성기동·책굴·양사재·상대포·돌정 고개 등으로 연계되는 왕인 설화가 구체성과 총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단순 조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도 아쉬움이 남는다. 따라서 이 설화가 의미하는 바를 서남해 지역의 해양사적 위치와 관련 지어 추론하면서 왕인의 새로운 이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왕인의 도일 시기]

왕인이 영암 구림에서 태어나 중국의 문자와 학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일본에 전파했다고 한다면, 이는 서남해 지역의 해양 교류사적 역량이 상당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왕인의 도일 시기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응신 천황(應神天皇) 16년 6월에 천황의 요청으로 백제의 왕인이 도착하여 태자[菟道椎郞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사기』에는 “백제의 조고왕(照古王)이 현인(賢人)을 보내 달라는 천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와니[和邇]란 인물을 보내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와니가 바로 왕인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년에 따르면 응신 천황 16년은 서기 285년(백제 고이왕 52)에 해당하고, 『고사기』에 나오는 조고왕은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4년]으로 비정되는 인물이므로, 양 사서에서 나타난 왕인의 도일 시기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고대 사서의 기년(紀年)이 그만큼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서기』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은 2주갑(二周甲)[120년] 내려서 재조정해야 실제 연대에 부합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면 왕인이 도일한 연대는 405년으로 재조정할 수 있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왕인의 도일 시기는 3세기 말[『일본서기』의 기년], 4세기 중·후반[근초고왕의 재위 기간] 또는 5세기 초반[『일본서기』 기년의 재조정]의 세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겠는데, 필자는 이 중 5세기 초반 설에 비중을 두고 있다.

[3~5세기 서남해 지역의 해양사적 위치와 왕인]

왕인의 도일 시기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세 가지 가능성을 모두 포괄한다 해도 3세기 말~5세기 초로 압축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서남해 지역의 해양사적 위치를 살펴보는 것은 왕인 설화의 사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

먼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왜인 조를 살펴보면, 3세기 무렵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서해와 남해를 따라 왜에 이르는 연안 해로가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른다면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곳에 위치한 서남해 지역은 3세기 이후 한·중·일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연안 해로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즈음에 해남 백포만 연변(沿邊)에 조성된 군곡리 패총과 두모 패총 등은 이 지역에 중요한 거점 포구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물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진서(晋書)』의 「장화 열전(張華列傳)」에 의하면 282년에 20여 국에 달하는 신미 제국(新彌諸國)이 집단적으로 진(晋) 왕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신미 제국이란 서남해 지역에 산재해 있던 세력 집단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서남해 지역 일대에는 적어도 3세기부터 중국 대륙 및 일본 열도와 교류하던 유력한 해양 세력이 존재하였고, 이들이 활동하던 거점 포구들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근래 이 지역에서 독특한 옹관 고분의 묘제가 산재해 있음이 확인되면서, 옹관 고분 조성 세력을 서남해 지역의 해상 세력으로 보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옹관 고분은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의 해역을 따라서 분포하고 있는 특유의 고분으로서, 그 분포로 보아 강과 바다를 통로로 하여 정치적 연대망을 형성했던 독자적 해상 세력이 서남해 지역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옹관 고분의 존속 기간이 3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왕인의 도일 추정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또한 설화에서 왕인의 고향으로 전하는 구림이 옹관 고분의 핵심 분포지인 영암 시종면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왕인이 옹관 고분을 축조한 서남해 지역의 해상 세력과 관련된 인물로서 구림에 실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구림의 왕인 설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구림에 전해 오는 왕인 설화는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조선 환여 승람』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 때문에 혹자는 왕인 설화가 예부터 전해져 온 연원이 깊은 설화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새로 만들어진 창작 설화일 가능성이 있음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들은 목포와 영산포를 중심으로 영산강변에 대거 이주하여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왕인을 한·일 문화 교류사의 상징적 인물로 내세워 일선동조의 명분을 극대화하고 조선인의 반발심을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왕인의 고향을 구림으로 비정하고 설화를 급조하여 유포시켰던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실제 구림의 80~90대 노인들의 증언을 청취해 보면 왕인의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고, 설령 들어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도 초등학교 시절 조회 시간에 일본인 교장의 훈화 중에 들어 본 것 같다고 회상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혹자는 구림에 전해 오던 도선 국사 관련 이야기가 왕인에 덧입혀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왕인의 고향이 왜 하필 구림인가’라는 의문과 함께 사실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구림의 왕인 설화는 국내외의 기록과 구비전승을 통틀어서 왕인의 국내 동정을 전하는 유일한 사례라는 점도 유의할 만한 대목이다. ‘구림=왕인 고향설’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인이 도일한 5세기는 백제의 해상 교역이 크게 위축되었고, 이 틈에 영산강 유역의 신미 제국이 백제의 의사에 반하여 왜와 매우 긴밀한 문화 교류를 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당시 신미 제국은 영산강 유역 일대에서 옹관 고분을 공유하는 세력 집단들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옹관 고분의 집중 분포지인 삼포강변의 시종면과 반남면이 구림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 셋째, 구림은 통일 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국제 포구인 상대포가 있었고 당시 최고의 고부가가치 상품이던 도기 생산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인 왕인의 시대에도 국제 포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왕인의 출신지를 확정짓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뜨거운 감자인 그의 출신지 문제를 직접 다루는 식으로 왕인 연구를 진행한다면 주장만 있을 뿐 더 이상의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현재로선 왕인의 상징성에 무게를 두면서 연구의 외연을 확대하는 방법을 의미 있게 타진할 필요가 있다. 왕인의 상징성이란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인 『논어』와 『천자문』을 수용하여 이를 문화 후진 지역인 일본에 전파한 점에 있다고 하겠으며, 그렇다면 왕인은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의의를 지닐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왕인을 구림 출신의 특정인이라 확정짓기보다는 연안 해로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매개한 상징적인 인물로서 자리매김해 두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왕인 연구의 진전을 위해서는 고대 동아시아 해양 교류사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서남해안의 고대 포구와 영암 구림의 해양사적 위치에 대한 연구는 물론,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진행되어 온 왕인에 대한 연구와 선양의 과정 및 내용, 일본 내에 산재해 있는 왕인 관련 유적, 더 나아가 구림이 왕인의 탄생지로 설정된 내력과 그 진실성 여부 등을 추적하는 방향으로 연구의 폭을 확대하고 좁혀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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