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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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와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영암]에 “가학현(駕鶴峴)은 영암군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해남]에 "가학산은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9첩 5면]에는 영암군 월출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전라남도 강진군을 거쳐 해남군 북서쪽에서 가학산을 이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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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제사를 올렸던 전라남도 영암군의 사당. 전라남도 영암군 남해신사(南海神祠)는 우리나라 3대 해신제 중 하나인 남해신사 해신제를 올렸던 곳이며, 나라의 안녕과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남해신사라는 이름은 『고려사(高麗史)』·『동국 여지지(東國輿地志)』·『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오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남해신 사당(南海神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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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남산리에서 해남군 계곡면 잠두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치는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보면 “가학치(加鶴峙), 마치(馬峙), 우슬치(牛膝峙)는 모두 해남 통로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후에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여지도(輿地圖)』에도 마치가 영암과 해남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기록되어 있다. 또 『청구도(靑邱圖)』에도 흑성산 서쪽, 맹포 동쪽의 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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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시대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과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있었던 행정 구역.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은 영암군 시종면을 비롯하여 나주시 반남면, 공산면, 동강면 일대에 있었다. 치소는 지금의 반남면 소재지에 있었으며, 주산인 자미산의 자미산성에서는 백제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반나부리’는 ‘큰 마을[大村]’, ‘큰 읍[大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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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을 비롯하여 나주시 반남면에 있었던 행정 구역. 반남군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었는데, 당나라가 백제를 멸한 뒤 반나(半那)로 고쳐 대방주(帶方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반남군으로 승격되어 영암 지역의 야로(野老)[금정면]와 곤미(昆湄)[미암면]의 두 현을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다. 반남군 치소의 주산(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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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과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있었던 행정구역. 반남현(潘南縣)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었는데,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를 멸한 뒤 반나로 고쳐 대방주(帶方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반남군으로 승격되어 영암 지역의 야로(野老)[영암군 금정면]와 곤미(昆湄)[영암군 미암면]의 두 현을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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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에서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로 넘어가는 고개. 밤재와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면 율치(栗峙), 율현(栗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율현은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율치로 기록되어 있고, 『호남 지도(湖南地圖)』에는 가학치(駕鶴峙) 동쪽의 고개로서 율치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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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운재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전기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영암의 보현원(普賢院)은 덕진면 영보리 보동 마을 영원재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폐원되었다. 역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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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소산리에서 학산면 매월리로 넘어가는 고개. 불치(佛峙)는 고개에 부처를 모신 당집이 있어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불치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불현(佛峴)이라는 지명으로 ‘남쪽으로 가는 고개’로 기록되어 있다. 또 『호남 지도(湖南地圖)』에 읍치 북서쪽, 주룡강 남쪽의 고개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불치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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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학송리에서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로 넘어가는 고개. 불티재는 풀칫재[草峙]에 대한 유래가 있는데, 풀칫재 서쪽의 노루재[누릿재]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서 풀치[草峙]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여러 사료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화현(火峴)은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화현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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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와 학산면 신덕리의 경계에 있는 산. 『대동지지(大東地志)』[영암]에 “은적산(銀積山)은 서쪽 2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고(輿地考)」[영암]에 “서호(西湖)는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니, 바로 주룡포 상류가 은적산(銀積山) 아래에 이르러 모여서 호수가 되었다.”라는 대목도 있다. 또한 김정호(金正浩)의 『동여도(東輿圖)』[20첩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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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를 왕래할 때 건너던 나루. 새원 나루는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에서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를 왕래할 때 옛 바다를 건너던 나루였다. 조선 시대에는 나주목 종남면에 있어 종남진이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간척으로 인해 새원 나루 상류의 갯고랑은 삼포천이 되었다. 나루 주변에 신원 마을, 즉 새원 마을이 있어 새원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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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정부 세곡 창고. 조선 시대 곤일종면 지역으로서 영암군의 서쪽에 창고가 있어 서창이라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 조에 의하면, “서창은 영암에서 서쪽으로 40리[15.71㎞]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삼호읍 원서창 마을을 말한다. 서창 마을은 이칭 창말, 창촌이라고도 한다. 창고 터는 서창 마을의 북쪽, 즉 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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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에 있었던 포구. 서창 포구는 조선 시대 서창(西倉)에 있었던 포구이다. 조선 시대 영암의 서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서창이라 하였으며, 조선 시대 서호면, 학산면, 삼호읍 일대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대동지지(大東地誌)』 창고조에 의하면 “서창은 영암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원서창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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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소흘리의 소(蘇) 자와 송산리의 산(山) 자를 따서 소산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 시대에 영암군 곤이종면(昆二終面)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흘리와 송산리를 병합하여 북이종면 소산리로 개설되었다. 이후 1930년 북이종면이 서호면으로 이름을 바꿈에 따라 서호면 소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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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 부선 마을 지역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시대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라 할 수 있다. 영암의 수원(燧院)은 신북면 부선 마을에 설치된 원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원은 폐원되고 꼭 필요한 곳에서만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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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시대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일대에 있었던 행정구역. 아로곡현(阿老谷縣)은 백제 때 지금의 영암군 금정면과 나주시 세지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치소는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 마을이다. 백제의 아로곡현은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노신(鹵辛)으로 개칭하여 동명주에 딸린 영현으로 삼았다. 757년(경덕왕 16)에 야로현(野老縣)으로 개칭되어 반남군에 딸린 현(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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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나주시·함평군·무안군을 거쳐 영암군과 목포시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영산강은 담양군 용면 용추봉(龍湫峯)[560m] 가마골에서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와 목포시 옥암동을 잇는 하굿둑까지 흐르는 국가 하천이다. 하천 연장은 111.68㎞, 유로 연장은 129.50㎞이며, 유역 면적은 3,467.83㎢이다. 한편 영산강 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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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에서 덕진면 노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한국 지명 총람』에는 영운재를 여운치(如雲峙) 또는 영원현(嶺院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시대 기록에서는 영운재를 영원치(嶺院峙) 또는 영원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19권에 1555년 나주와 영암 일대에서 싸움이 있었고 치근이 영원(嶺院)에서 적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또 『여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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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에 있었던 포구. 용당리 포구는 조선 후기에 지금의 전라남도 목포시 만호동에 있었던 목포진과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를 연결하는 포구였다. 용당진(龍塘津), 용당 나루, 용댕이 나리라고도 하였다. 전라남도 삼호읍 용당리 마을에서 유래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용당진은 무안 목포진과 통한다.”라고 하였으며, 『1872년 지방 지도(1872年地方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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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시대 전라남도 영암군의 영암읍, 군서면, 덕진면, 도포면 일대에 있었던 행정구역. 영암군은 고대 국가 성립기에는 대형 독무덤의 분포로 보아 마한 54국 중 하나로 중심권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백제에 복속되어 월내군(月奈郡)이라 불렀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 복속되어 월내군(月奈郡)이라 불렀다. 남북국 시대에 이르러 757년(경덕왕 16)에 영암군이라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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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의 정부 세곡 창고. 이진창(梨津倉)이 있었던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은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이진창은 지금의 해남군 북일면, 북평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 조에 의하면 “이진창은 영암에서 남쪽으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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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에 있었던 나루. 주룡포는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 미교 마을 나릿개에서 영산강을 건너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를 왕래하던 나루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주룡진(駐龍津)은 남쪽 50리에 있으며 영암의 경계로 통한다.”라고 한 곳이다. 주룡은 영암과 무안 사이를 흐르는 지금의 영산강 물길을 말하는데, 약 500m의 좁은 물목이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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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학송리 지역에 있었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선 전기의 숙박처. 공무상 여행하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숙식처는 객사(客舍)와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요로(要路)에 설치한 여관이다. 영암의 청풍원(淸風院)은 조선 전기에 지금의 영암읍 학송리 개신리 미륵동 마을 지역에 설치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폐원되었다. 역참 제도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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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세곡 창고. 영암군 군서 해창은 별칭 원해창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영암군 일대에서 생산된 대동미 등 세곡을 해창에 모았다가 배에 싣고 한양으로 출발한 곳이다. 그런데 이전의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나 19세기 무렵 망호리의 뱃길이 토사의 퇴적으로 어려워지자 군서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