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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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布 |
영어의미역 | gangpo cotton |
이칭/별칭 | 강릉베,상포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혜정 |
[정의]
강릉 지방에서 직조된 베.
[개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의복 재료로 사용하여 온 것은 대마(大麻), 저마(苧麻)이다.
옛 문헌에는 대마와 저마를 구분하지 않고 마(麻)로 기록한 경우가 많고 이들 직물의 경우도 포(布)라고 기록한 경우가 많다. 대마는 기후에 잘 적응하는 식물로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며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왔다.
[연원]
옛 직물에 있어서 포(布)란 대마포(大麻布)와 저마 즉, 삼베와 모시를 뜻한다. 마섬유는 섬유가 길어서 사람 손으로 방적하기가 쉬워 의복용 섬유로 처음 사용되었다. 모시나 삼이 우리나라 풍토에서 재배하기 적당하여 목화가 들어오기 전인 고려시대 말기까지 비단을 입을 수 없던 서민층에게 애용되어 온 것이다.
[명칭유래]
조선시대의 의료(衣料) 생산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마포였다고 한다. 함경도의 육진포(六鎭布)를 최고품으로 쳤는데, 이것을 북포(北布) 라고도 하였다. 가장 가는 베 한 필은 바릿대(鉢)에 넣을 정도로 가늘고 부드럽다 하여 발내포(鉢內布)라고 하였다. 경상도 각지에서도 마포가 생산되어 영포(嶺布)라고 하였고, 안동군에서 나오는 것을 안동포라 하였다.
강원도에서 나는 포는 강포(江布) 또는 상포(常布)라 하였는데 품질이 좋지 못해 상복(喪服)이나 수의(壽衣)로 사용하며 농촌의 농부들이 여름옷으로 많이 착용하였다.
[역사적 관련사항]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강릉 지방에 대마가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고 조세(租稅) 품목에도 대마가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오래전부터 강릉 지역에 대마가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강포는 섬유가 섬세하지 못해 고급품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으나 서민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직물이었다. 강릉은 바다와 산간을 끼고 있어서 농토가 적은 관계로 어업이 생업을 이루어 부녀자들은 많은 노동력을 길쌈에 쏟을 수 있었다. 원료가 되는 대마는 인근 평창[마디가 없고 고르다]이나 삼척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는데 솜씨 좋은 부인들은 장날이면 대마를 사서 가정에서 직조하였다. 대마 한 단이면 삼베 한 필을 만들었고 대마가 좋아야 세포(細布)를 길쌈할 수 있었다. 집안 살림하며 부지런히 삼아도 혼자서는 한 겨우내 다섯 필(엿세) 삼으면 더 못한다고 했다. 강릉 단오제의 단옷날을 기해 삼베 필을 팔기도 하였다.
강릉 지역에서는 1970~1980년대 전까지만 하여도 8세~10세 정도의 가늘기로 베를 짜야만 했고 양가집에서는 타지[양양 인근]에서 시집오는 신부는 굵은 베를 해옴으로써 시가 어른들께 ‘지팡이가 집혀야 입겠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진호 여사의 실화(實話)이다.
대마 한 단에 한 필[엿세베]이 난다. 사랑방에서는 아들이 공부를 하고 안방에서는 어머니가 삼을 삼고 있자면, 아들이 공부하다가 몇 번씩 건너와서는 “어머니 주무세요.”라고 물어 본다. 그러면 어머니는 으레 “그래 요것만 삼고 자자.”고 대답하셨다. 때로는 적신 삼을 감추시고 “그래 자자. 다 삼았다.”라고 거짓말을 하시고 아들이 건너간 후 마저 삼으셨다. 어머니는 1년에 5~6필의 마직물을 팔아서 학비에 충당하셨다.
[현황]
강릉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사용했으리라 짐작되는 방추차(紡錘車)가 많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길쌈에 사용하던 여러 가지 도구가 민속자료로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