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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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端午祭 |
이칭/별칭 | 단오굿,단오 놀이,단양제,단양굿,단양 놀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광선 |
[개설]
강릉 단오제는 지역민들이 신에게 안녕과 풍요 다산을 기원하는 공동체 의례이자 우리나라 단오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 축제이다. 음력 4월 5일, 신주 담기를 시작으로 4월 15일, 대관령 산신제 및 국사 성황제를 갖고 단풍나무를 신목으로 모시고 강릉으로 내려와 국사 여성황사에 합사한다. 음력 5월 3일, 제장을 남대천(南大川) 단오장 가설 제단으로 옮겨 단옷날 전후 8일간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제례, 단오굿, 관노 가면극 등 3개 부분을 중심으로 단오와 비단오 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이다. 강릉 단오제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구 세계 인류 구전 및 무형 문화유산 걸작]에 등록되었다.
[오래전 긴 역사]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기록된 제천 의례가 강릉 단오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5월 단옷날 시조신(始祖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남아 있고,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단오를 수릿날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명주장군 왕순식(王順式)의 대화에서 대관령에서 제사하였다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대관령 치제에 대한 첫 기록으로 ‘천년 단오’의 모티프다. 이후 허균(許筠)[1569~1618]이 1603년 강릉에 머물 때 단오제 행사를 보고 기록을 남겼고 후대에 들어 지역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릉 지역 어르신들은 일제 강점기나 6·25 전쟁 중에도 단오제를 보았다고 한다.
강릉 단오제는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 있거나 고증을 통하여 원형 복원이 가능할 만큼 잘 전승되었다. 이런 덕분에 강릉 단오제는 1967년 1월 16일 국가 무형 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면서 민속 축제의 원형성을 간직한 단오 축제로서의 가치를 획득하였고, 2005년 11월 25일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 구전 및 무형 문화유산 걸작’으로 등록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 명칭은 2008년 6월 제2차 무형 문화유산 보호 협약 당사국 총회의 제도 변경에 따라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바뀌었다.
[강릉단오제의 구성]
강릉 단오제는 1967년 제례와 단오굿, 관노 가면극 등 3개 부분으로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후 재구성과 첨삭을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대천에서 열리는 강릉 단오제는 단오 문화와 비단오 문화 행사가 한데 어우러진 축제이다. 단오 문화 행사로는 지정 문화재인 제례, 단오굿, 관노 가면극을 비롯, 지역 문화재인 「강릉 학산 오독떼기」, 강릉 사천 하평 답교놀이, 강릉 농악 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또 단오 세시 풍속은 체험 행사로 접근할 수 있으며 깃발 사진전을 비롯한 해외 공연단, 강릉 사투리 경연 대회 등 비단오 문화 행사는 단오장 각 공연장에서 연일 매시간 100여 차례 진행되고 있다.
[축제는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제의는 서로 비슷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는 절차이다. 강릉 단오제는 강릉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영동 일원, 내륙까지 넓은 지역에서 신앙하는 제의이다. 모시는 신은 산신, 국사 성황신 그리고 국사 여성황신이다. 이들은 각각 실존 인물인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범일 국사(梵日 國師), 정씨가(鄭氏家) 여인인데 근원 설화가 전한다.
김유신은 산신으로 어려서 명주[강릉]에 유학을 왔다고 한다. 김유신이 가진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90일 만에 만들었는데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고, 훗날 그 칼로 삼국을 평정했다. 죽어서는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
국사 성황이 된 범일은 신라의 고승이다. 옛날 학산(鶴山)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우물가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속에 해가 떠 있었다. 다시 떠도 해는 떠 있어서 물을 마셨다. 처녀는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처녀의 부모는 주위의 눈이 두려워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뒷산 학바위에 버렸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처녀가 학바위에 올라가보니 갓난아기를 학이 돌보고 있었다. 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감싸고 단실 세 개를 먹여 주고 날아갔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처녀의 집에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 아이가 범일이다. 범일은 7세 때 경주로 공부하러 떠났고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뒤 영화(榮華)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굴산사(掘山寺)에서 정진하였다. 사후 대관령 국사 성황이 되어 이 지역을 돌보게 되었다.
대관령 국사 여성황신은 정씨가의 여인이 신격화되었다. 오래전 경방에 정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대관령 서낭이 보낸 호랑이에게 업혀갔다. 이튿날 딸이 보이질 않자 이웃에게 물으니 간밤에 호랑이가 업고 가더라고 했다. 아버지는 얼마 전 꾼 꿈이 생각났다. 꿈에 대관령 서낭이 딸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인간과 신은 맺어질 수 없다며 거절했던 것이 기억났다. 급히 대관령 서낭당에 가 보니 딸이 서낭당 옆에 있는데 벌써 비석처럼 굳어져 떨어지지 않았다.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려 세우니 그때서야 시신이 떨어졌다. 국사 서낭과 처녀가 혼배(婚配)한 날이 4월 15일이며 그 후 여성황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유교와 무교식 제의]
1. 신주 담기
4월 5일 실행한다. 이날 빚은 술은 4월 15일 대관령에서 열리는 산신제와 국사 성황제의 제주로 사용된다. 강릉시장[강릉 부사]이 술을 담글 쌀과 누룩, 솔잎을 강릉단오제 보존회에 전하면 제관과 무녀, 시민 등이 강릉 일원을 돌아 칠사당(七事堂)에서 술을 담근다. 신주 담기를 앞두고 강릉 시민의 정성, 쌀을 모으는 행사를 신주 미봉정이라고 하는데 이날 모은 쌀로 술과 떡을 빚어 강릉 단오제 행사 중에 무료로 제공한다.
2. 대관령 산신제 및 국사 성황제
대관령에서는 먼저 산신을 모시고 이어 국사 성황제가 열린다. 대관령 산신제는 음력 4월 15일 오전 10시 대관령 산신당 앞에서 지낸다. 초헌관은 강원도의 산림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동부 지방 산림청장이 맡아왔다. 이어 오전 11시, 성황사에서 강릉시장을 초헌관으로 국사 성황제가 열린다. 성황제를 마친 뒤 음복을 하고 산정으로 신목을 모시러 올라간다. 대관령 정상 부근의 단풍나무에 국사 성황이 강림한다고 믿는다. 신목잡이와 무녀들은 신이 강림한 나무를 찾아 신으로 모시고 내려온다. 신목에는 주민들의 소원을 적어 놓은 오색(五色), 오방색(五方色) 천을 예단으로 건다.
3. 국사 행차
신목을 모신 일행들이 대관령을 내려와 구산, 구정 서낭제를 지내고 국사 여성황사에 봉안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강릉 시내 초입에 위치한 구산 서낭당 영산신은 국사 성황과 여성황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이라 하고, 작은 아들은 굴면이 서낭이라고 한다. 이날은 성산 면민들이 점심을 준비하여 참가자들을 대접한다.
이어 범일 국사의 탄생 설화를 간직한 학산 서낭당을 찾는다. 학산은 범일 국사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곳으로 1999년부터 국사 행차에 추가되어 학산 서낭당에서 주민들과 함께 제를 지낸다. 국사 행차의 마지막 종착지는 대관령 국사 여성황사이다. 이곳에서 5월 3일[음력]까지 국사 부부가 함께 한다. 이는 강릉 단오제의 이념인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4. 영신 행차와 조전제
5월 3일, 강릉 단오제 전야제라고 할 수 있는 영신 행차가 펼쳐진다. 먼저 대관령 국사 여성황사에서 영신 행차를 알리는 제례를 올리고 여성황의 친정인 경방 댁으로 자리를 옮겨 한차례 제사와 굿을 받는다. 그동안 영신 행차에 참여할 주민과 관광객들이 강릉 의료원 인근 지정 장소로 모여든다.
경방 댁을 떠난 신목이 중앙로에 인접해 오면 횃불을 밝혀 「영산홍가(映山紅歌)」를 부르며 신을 맞는다. 그리고 함께 행렬을 이루며 중앙로, 옥천 오거리, 중앙 시장을 돌아 남대천 가설 제단까지 행차한다. 무격과 제가, 그리고 신목을 앞세우고 관노 가면극 회원, 농악회원, 지역민 등이 참여해 단오등을 들고 행진하면서 장관을 연출한다.
신목이 남대천 가설 제단에 좌정하면서 본격적인 강릉 단오제가 시작된다. 가설 제단에서는 매일 오전 10시에 유교식 제례인 조전제(朝奠祭)가 열린다.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헌관으로 참여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어서 무교식 의례인 굿이 펼쳐진다. 굿은 신을 모시고 정식으로 지내는 단오굿이 있고, 중간에 재미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축원굿을 벌이기도 한다.
5. 송신제와 소제
강릉 단오제 마지막 날에는 오후 5시께 송신제(送神祭)를 지내고 제단에서 사용되던 신목을 비롯한 지화(紙貨), 지등(紙燈) 등 의례용 소품들을 불태운다. 남대천 모래톱에서 소품을 모아 태우는 것은 제사에서 소지 올리듯 우리의 의지를 전달하고 신을 돌려보내는 절차이다.
[단오굿]
1. 단오굿 내용
굿은 무(巫)의 종교 의례이다. 강릉 단오제는 예전에 강릉 단오굿이라고 불릴 만큼 의존도가 강하다. 현대 문명이 발달하면서 여흥거리로서 굿의 효용성은 크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강릉 단오제를 축제답게 이끄는 요인이다. 굿은 지역민들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제액초복(除厄招福), 무병장수(無病長壽), 생로병사(生老病死) 등 인간의 삶 전체를 관장하는 풍부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가지고 있다.
굿이 펼쳐지는 가설 제단을 굿당이라고 부른다. 굿당은 제단과 굿마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단은 제물을 진설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고, 굿마당은 굿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용도에 따라 무녀석(巫女席), 악사석(樂士席), 관중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굿당은 지화와 지등으로 장식된다. 제단에는 신목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지화가 장식되어 있다. 지화는 장식적인 목적도 있지만 무속에서 생명을 의미한다. 지화는 한 송이마다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송이를 한 다발로 묶어 살잽이꽃, 국화, 덤불국화, 목단화, 출화 등으로 불리며 18종류가 있다고 한다.
지화와 함께 있는 지등은 신들의 이동과 관계가 있다. 호개등은 신들이 굿당을 찾아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등이며, 밤길을 오고가는 신을 위해서 길을 밝히는 초롱등이 있다. 또한 물길을 이용할 신들을 위해 용선(龍船)이 준비되어 있고, 죽은 사람이 수박 덕에 이틀을 더 살았다는 수박등도 있다.
지화와 지등의 외부를 장식하는 문양들도 무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문양을 ‘사’라고 부른다. 우선 색종이는 비단을 상징하는데 비단은 옷감이다. 나비사는 영혼을 상징하고, 물결사는 용왕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달사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산사는 산신을 의미한다.
2. 단오굿의 제차
굿이 펼쳐지는 순서이다. 굿의 의미에 따라서 장소를 정화하는 부분[淨化], 신을 부르는 부분[請神],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고하고 신의 대답을 듣는 부분[祝願],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는 부분[娛神], 그리고 신을 돌려보내는 부분[送神] 등 다섯 부분으로 보지만 크게는 청신-오신-송신 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청신은 부정굿·청좌굿·화회굿 등으로 신을 맞는 맞이굿이고, 오신은 조상굿·세존굿·심청굿·성주굿·군웅 장수굿·칠성굿·지신굿·산신굿·손님굿·천왕굿·용왕굿·제면굿으로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는 시간이다. 송신은 꽃노래굿·뱃노래굿·등노래굿·대맞이굿·환우굿으로 신을 보내는 봉송굿이다.
먼저 청신에서 부정굿은 신을 모시기 전에 부정한 것을 씻어버리는 의례이다. 강릉 단오제에서는 거의 모든 행사에 앞서 부정굿을 벌인다. 청좌굿[성황굿]은 성황신을 모시는 굿이다. 화회굿은 모든 신들이 오시어 굿당에 동참하고 다툼 없이 주어진 역할을 다해 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오신에 해당하는 조상굿은 집안의 조상을 모시는 굿으로 자손을 잘 보살펴 달라는 축원을 담고 있다. 세존굿은 시준굿, 당고마기 삼신굿으로 불리며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서사 무가(敍事巫歌)이다. 성주굿은 솔씨를 뿌려 가꾸고 재목을 키워 베어서 집을 짓고, 세간을 들이고 다복하게 산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군웅 장수굿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는 신이다. 매년 단옷날[음력 5월 5일] 정오 무렵에 펼쳐짐으로써 무당굿의 최정점으로 보기도 한다.
심청굿은 눈병나지 말고 봉사를 막아 달라는 장편 서사 무가로 내용은 「심청전」과 대동소이하다. 칠성굿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고 인간사 모든 일에 만능의 신력을 가진 신으로 통한다. 천왕굿은 일명 원님굿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더듬는다. 손님굿은 마마굿이라고도 한다. 천연두, 홍역 등 병을 막기 위한 굿으로 장편 서사 무가이다. 제면굿은 무녀가 나온 내력을 밝히는 굿이다. 굿 도중에 곡식의 종자를 상징하는 제면떡을 관람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제면떡을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는 단골[무당]과 신도 간의 우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송신을 위한 굿은 화려하다. 꽃노래굿은 제단의 지화를 들고 춤추고 노래한다. 등노래굿도 굿당을 장식했던 등을 떼 내어 춤춘다. 등노래굿은 두 번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에는 초롱등을 둘이 나누어 춤추고 이어서 다른 무녀가 천장에 걸렸던 가장 큰 탑등을 들고 춤을 춘다. 탑등을 돌리고 던지는 등 빠른 춤사위가 돋보인다. 뱃노래굿은 선개용선을 타시고 탈 없이 가시라는 뜻이다. 굿당에 매달린 용선에 흰 무명천을 길게 메어 흔들고, 노 젓는 흉내를 내며 뱃노래를 부른다. 대맞이·환우굿은 제단에 모셔 두었던 신목을 모셔내고 정성을 올린 뒤 그동안 잘 보셨는지 묻고, 굿에 사용되던 위패와 신간(神竿) 등 상징물들을 태우는 의식이다.
[관노 가면극]
인간의 갈등과 화해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가면극으로 강릉 단오제의 이념인 화해와 조화, 화합을 구현한다. 관노 가면극 연희자가 관노(官奴)들이었다는 특징으로 인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한국의 가면극 중 유일한 무언극(無言劇)으로 춤과 몸짓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공연 줄거리
관노 가면극은 총 5과장으로 구분된다. 먼저 1과장은 공연을 위한 입장과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이때는 장자마리가 등장하여 장내를 정비하면서 자신들의 기량을 선보인다. 이어 2과장에서는 소매각시와 양반광대가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소매각시를 보자 한눈에 반해 구애하고 서로 사랑한다. 3과장에서 시시딱딱이는 둘의 사랑을 질투하며 훼방을 놓는다. 둘 사이를 갈라놓고 소매각시를 회유하여 함께 춤을 춘다. 기회를 노리던 양반광대가 시시딱딱이를 내쫒고 소매각시를 찾아오지만 정절을 의심한다. 4과장에서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외면당하자 양반의 수염에 목을 매 자살 소동을 벌인다. 양반광대는 소매각시가 죽은 줄 알고 괫대로 가서 신에게 빌지만 소매각시는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아난다. 소매각시는 극적으로 양반광대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서로의 오해를 풀어 화합하는 것이 마지막 5과장이다.
2. 등장인물의 특징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특별하다. 장자마리는 포를 뒤집어쓰고 있어 ‘포쓴놈’으로도 불렸다. 머리에는 계화(桂花)를 꽂았고 눈과 입, 코만 뚫어 놓았다. 옷에는 둥근 테를 넣었고 말치 등의 해초와 곡식을 매달아 풍요를 상징하는 토지신으로 본다.
양반광대는 가면은 흰 얼굴에 긴 수염, 꿩털을 단 검은 고깔로 표현할 수 있다. 긴 담뱃대와 접이부채를 가지고 등장한다. 담뱃대와 부채는 권위를 상징한다. 국사 성황으로 수호신격이다. 소매각시는 국사 여성황으로 생산, 생명력의 봄을 의미한다. 노랑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는다. 하얀 얼굴에 반달형 눈썹, 연지·곤지를 하고 있다. 시시딱딱이는 두루마기 형식의 검은 옷을 입었다. 흰 얼굴에 칼자국과 오색 칠을 하였으며 험하게 생겨 병을 막아 주는 여역신(癘疫神)으로 인식하고 있다.
[단오장과 민속 문화]
강릉 단오제의 현대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단오장[난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축제 개념을 식재한 난장은 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고, 혼돈과 혼란을 풀어내고 내일을 위해 스트레스와 삶의 무게를 털어내는 해방 공간이다.
난장에서는 쇼핑 욕구 해소와 새로운 맛을 즐기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또 물건 가격이 엄청 싸다. 어렵던 시절, 단오장은 서민들이 신상품을 가장 먼저 만나고, 생필품을 조달하는 최적지이었을 것이다. 또 전국의 맛있는 요리가 총집합한다. 덕분에 강릉 단오제 기간 중에 강릉의 계모임, 회식, 동문회 등은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난장을 찾는다. 단오 용돈, 단오 가불, 단오 보너스는 강릉의 명절 분위기를 대변한다.
서울로 간 친구들도 단오 때면 고향으로 친구를 찾아온다. 그래서 단오장은 만남의 장소이며 쌓였던 회포를 풀어내는 해방의 공간이다. 강릉에는 ‘단오 기간 중에 한 번이라도 단오장 난장을 찾지 않는다면 좀이 쑤셔서 못 견딘다’는 말이 있다. 뭔가 잊어버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학자들은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한다.
1. 단오장에서 볼 수 있는 놀이
씨름과 그네뛰기는 단오놀이의 상징이다. 강릉 단오제에서는 씨름 대회가 열리는데 단체전과 개인전 경기를 치른다. 단체전은 주로 강릉 시민이 팀을 꾸며 참여하고, 개인전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단체전 우승자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를 포상한다.
그네는 단오 때 여성의 놀이로 바깥 구경을 못하던 젊은 여인네들이 단옷날 하루만은 밖에 나와 해방감을 누리던 놀이이다. 「춘향전」에서 이 도령과 춘향이가 그네 터에서 만나 자유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단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오장에는 단오 세시를 만끽할 수 있는 체험관이 있다. 강릉 단오제 기간 중 계속 운영되는 체험관에는 수리취떡 만들기, 단오 부적 받기, 창포 머리 감기, 창포 비녀 만들기, 단오 부채 그리기 등 단오와 관련된 세시 풍속을 즐길 수 있도록 재료와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강릉 단오제와 지역 전통문화를 한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관노 탈 그리기, 방짜 열쇠고리/수저 만들기, 단오 신주 맛보기 등의 콘텐츠를 풍성하게 마련해 놓고 있다.
2. 강릉의 민속놀이
강릉 단오제는 종합 축제의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단오장에서는 강릉시, 강원도, 대한민국의 무형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강릉 지역 무형 문화재 공연장에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은 강릉 농악으로 국가 무형 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릉 농악의 가장 큰 특징은 일 년 동안의 농사짓는 과정을 모의하는 농사풀이에 있다. 소를 몰며 논을 갈고, 모 심고 그리고 김매고 벼를 베어내는 추수와 타작, 방아찌기까지 전 과정을 춤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동고리는 절정이다. 참여자 어깨로 사다리를 만들고 무동이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상모를 돌리는 3동거리와 5동거리는 보는 이들의 감탄사를 자아낸다.
용물달기는 마을의 우물이 마르지 않고 가뭄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민속놀이이다.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 짚으로 수신(水神)인 용을 만들어 마을의 동서남북 네 곳의 우물에 용을 잠시 담갔다가 자정 무렵에 꺼낸 다음 임경당(臨鏡堂) 우물로 옮기며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강릉 학산 오독떼기」는 논매는 소리로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서 전승되는 민요이다. 고된 농업 노동요로서 「모심는 소리」·「논매는 소리」·「벼 베는 소리」·「벼 터는 소리」·「벼등짐 소리」 등 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곡조가 전승되고 있다. 강원도 무형 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력 2월 6일 좀상날, 이 날은 농경 사회에서 옛날부터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던 날이다. 강릉시 사천면 하평리에서는 매년 좀상날에 다리를 밟으며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으며 좀생이별과 달의 거리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단오 유적지]
대관령 : 대관령 정상을 넘어 재궁골을 지나 가시머리에 들어서면 신을 모신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강릉 단오제의 주신인 국사 성황을 모신 성황사와 산신당 그리고 칠성당과 용정이 모여 있다.
구산 서낭당 : 대관령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일 국사와 여성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서낭이 모셔져 있다.
학산 서낭당 : 학산은 국사 성황의 고향이고, 생전에 수도를 닦던 굴산사가 있던 곳이다. 국사 행차 일행이 학산을 찾은 것은 1999년부터이다. 이날 이후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제상을 마련하고 정성껏 제를 올린다.
대관령 여성황사 : 국사 성황은 4월 15일 대관령을 내려와 여성황사에서 보름동안 함께 지낸다. 지역민들은 이를 통하여 화해와 음양의 조화 그리고 풍농을 기원한다.
석천 : 굴산사지 인근에 있는 우물로 문씨 처녀가 해가 떠있는 물을 마시고 범일을 잉태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샘이다.
학바위 : 굴산사지 북서쪽 야산 중턱에 큰 바위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학바위라고 한다. 학바위는 ‘처녀가 애를 낳았다’며 아이를 버린 곳으로 학이 아이를 감싸고 먹을 것을 주어 보살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당간 지주 : 깃대를 고정하기 위해 사찰의 입구나 뜰에 세우는 두 개의 돌기둥이다. 굴산사지에서 좀 떨어진 남쪽 벌판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돌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일각에서는 당간 지주의 크기를 보고 굴산사의 규모를 짐작하기도 한다.
부도 : 굴산사지 북쪽 언덕에 위치한 부도는 8각 원당형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범일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