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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545
한자 金炳學
영어음역 Gim Byeonghak
이칭/별칭 경교,영초,문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성별
생년 1825년연표보기
몰년 1879년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이며, 백부(伯父)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조카이다. 후사가 없어 김병유(金炳儒)의 아들 김승규(金昇圭)를 입양하였다.

[활동사항]

김병학은 1825년(순조 25)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1853년(철종 4) 현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사간이 되었다. 당시 안동김씨의 제2차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하였으나,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딸을 며느리로 줄 것을 약속한 평소의 친분으로 1864년(고종 1)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찬성을 지냈다.

1866년 조대비(趙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철회하고 왕의 친정이라는 명목 아래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명실상부하게 되자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좌의정에 등용되었다. 같은 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 등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보수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는 천주교의 탄압을 극력 주장하였고, 병인양요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에게 권고하여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를 승정원동부승지로 등용하도록 천거하였다. 또 학규(學規)가 날로 무너져서 선비들이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그 시정을 건의함으로써 성균관 유생에 대한 월과강식의 법을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의정을 거쳐 1875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된 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의 체결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1879년(고종 16)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판부사 홍순목(洪淳穆),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등과 함께 연차(聯箚)를 올려 일본이 요구하는 인천·원산의 개항 가운데 원산은 허가할 수 있으나, 인천은 서울의 백 리 안에 있으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구룡골에 있다가, 도시화로 1979년 온양민속박물관에 의해 발굴 화장되었으며, 부장품은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의 비문은 아우 김병국(金炳國)이 짓고, 글씨는 종질(從姪) 김흥균(金興均)이 썼다.

[상훈과 추모]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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