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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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炳國 |
영어음역 | Gim Byeonguk |
이칭/별칭 | 경용(景用),영어(穎漁),충문공(忠文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각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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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
성별 | 남 |
생년 | 1825년 |
몰년 | 1905년 |
본관 | 안동 |
대표관직 | 영돈녕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용(景用), 호는 영어(穎漁).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이며, 형은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이다.
[활동사항]
김병국은 경기도 안산현 구룡골[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서 태어났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대교(待敎)를 거쳐 1853년 대사성에 올랐다. 1857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 안동김씨 세도의 물결을 타고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860년 훈련대장이 되었다.
형 김병학과 더불어 흥선대원군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5년 경복궁 중건 때에는 판중추부사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역임하였다. 병인양요 뒤 군제를 개편하고 인사 배치를 다시 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정리사(整理使)를 거쳤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 친정(親政)의 이름을 빌어 민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예조판서에 중용되어 우의정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대한 고종의 자문에 대해 사태를 보아서 강구하자는 중도적인 입장이었으나 인천 개항에는 반대하였다. 1878년 좌의정이 되었고, 1880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따라 연미국론(聯美國論)을 제기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사태 수습에 나선 대원군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자 영삼군부사(領三軍府使)가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 총리통리내무아문사무(總理統理內務衙門事務)를 거쳐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영의정세자사총리군국사무(領議政世子師總理軍國事務)를 지냈고, 같은 해 영돈녕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致仕)하였다. 1905년 12월 13일 안산에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김병국이 지은 「예릉지문악장(睿陵誌文樂章)」이 『예릉지장(睿陵誌狀)』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던 묘소는 일대가 도시화가 진행되던 1979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발굴 후 화장하였으며, 발굴품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906년에 세운 묘표의 비문은 본래 김병국이 생전에 지은 묘표에 사후 손자 김용진(金容鎭)이 부기한 묘지(墓誌)로 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