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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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초부터 4월 하순까지 영암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 운동. 1919년 3월 초 영암군에도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극환(曺克煥)·최한오(崔漢五) 등 영암읍과 구림리의 뜻있는 이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를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 4월 10일 영암읍 장날에 맞추어 아침 일찍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전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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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전라남도 영암군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한국전쟁, 6·25 사변, 한국동란 등으로도 불리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남한과 국제 연합군이 북한과 중화 인민 지원군에 맞섰던 전쟁이다. 한반도 내부에서 좌익과 우익, 남한과 북한이 대결하는 내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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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역사. 개항기는 일반적으로 1876년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이후 1910년 식민 통치 체제로 전환되는 시기까지를 통칭한다. 사회적으로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수용을 통해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체제로 변화되어 가는 상황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 각 나라와도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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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지방에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반대한 개인과 단체의 저항 운동. 전통적으로 영암은 전라도 지역 교통의 요지이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주요한 침투 대상으로, 강한 경제적 침략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여기에다 일찍부터 사족의 문화가 발달하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던 만큼 항일 운동의 전통도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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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전라남도 영암군의 인물. 영암 지역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식민 통치가 이루어진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지정받은 인물가운데 영암과 관련된 인물은 총 63명이며, 이 가운데 39명이 영암 출신일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의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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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규상(朴奎相)[1893~1921]은 1919년 경성 약학 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인 영암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박규상은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 약학 전문학교생(京城藥學專門學校生)으로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독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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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흔홍(朴炘弘)[1886~1966]은 영암 출신으로, 본적 및 활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이다. 1919년 4월 10일 영암군 군서면에서 발생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 박흔홍은 1919년 4월 10일 군서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한오(崔漢五)·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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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 서남해 지역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영암은 바다와 강, 산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자연 환경과 내륙과 도서·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고대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고대에는 옹관 고분 문화권의 중심지였고, 고려 시대에는 주변의 8개 군현을 아우르는 지역 거점이었다. 조선 시대 이후 주변 지역이 분리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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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전라남도 영암 지역 미취학 아동을 위해 설립한 사설 교육회. 일제 강점기인 1922년 당시 영암군 11개 면에 보통학교가 3개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1개는 사립이었다. 보통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지원자 3백 명 중 불과 60명만 선발되는 열악한 상황이 지속되자, 지역 유지들이 교육 여건 개선을 위해 학술 강습회를 설립하였다. 『동아 일보』에 의하면 영암 강습회(靈岩講習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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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활동한 기독교 청년 단체. 영암 기독 청년회는 복음적 기독교에 기초하여 회원 상호의 친목을 도모하고, 기독교 전파와 애국 계몽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동아 일보』에 의하면 영암 기독교 청년회(靈岩基督敎靑年會)는 1922년 5월 28일에 영암군 야소 교회에서 설립하였다. 기독교 관련 청년 단체로, 전도 활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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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야간 교육 기관. 일제 강점기 영암 지역 노동 계층의 향학심을 높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영암 청년회에서 영암 노동 야학회를 설립하면서, 영암의 여러 지역별로 노동 야학회가 별도로 설립 운영되었다. 1922년 가을에는 농덕 청년회(農德靑年會) 노동 야학회를 결성하였고, 1922년 겨울에는 영보 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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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동무리에 있는 현대 3·1 운동 기념비. 영암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영암읍에 거주하던 조극환(曺克煥)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준비하고, 4월 10일 실행에 옮겼다. 약 1천여 명의 지역민들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이 날의 시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25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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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해 조직되었던 민간 자치 기구. 1945년 8월 광복 직후 좌우익이 함께 참여했던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 우익이 탈퇴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 좌익은 건국 준비 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해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의 건국 준비 위원회 지회들은 지역별 인민 위원회로 전환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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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의 역사. 영암군은 영산강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과 바다를 경계로 목포와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원년) 목포가 개항된 이후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육상 교통로의 경우 강진군 관내 병영을 경유하여 장흥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화물과 사람의 왕래가 편리해졌다.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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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 조극환(曺克煥)[1887~1966]의 본적은 전라남도 영암 송평(松平)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 교동(校洞)이다. 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창녕 조씨(昌寧曺氏)인 아버지 조병헌과 어머니 김금옥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영암의 향리 가문으로 비교적 윤택하였다. 1919년 영암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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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조직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한 임시 행정 기구.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대비한 비밀 조직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자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치안 유지와 건국 준비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전국의 도, 시, 군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급속히 결성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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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기준(崔琪焌)[1896~1957]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호는 지암(芝菴)이다. 활동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西鳩林里)이다. 1919년 영암 지역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영암 지역에서는 영암읍의 조극환(曺克煥)·정학순(鄭鶴順)과 서구림리의 박규상(朴奎相)·최한오(崔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