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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048
한자 金竹坡
이칭/별칭 김난초(金蘭草),김운선(金雲仙)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김죽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김죽파 협률사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김죽파 조선 권번에서 김운선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김죽파 결혼과 함께 연주 활동 중단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김죽파 연주 활동 재개
활동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김죽파 국가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 지정
몰년 시기/일시 1989년연표보기 - 김죽파 사망
성격 국악인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경력 국가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

[정의]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가야금 유파를 창조한 국악인.

[개설]

김죽파(金竹坡)[1911~1989]는 영암 출신으로, 본명은 김난초(金蘭草)이다. 가야금산조의 명인이자 처음으로 가야금 산조의 틀을 짰다고 일컬어지는 김창조(金昌祖)의 손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예명은 김운선(金雲仙)이다. 여덟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할아버지 타계 후 11세부터 13세까지 한성기(韓成基)에게서 산조와 풍류,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1922년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하여 호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 16세 때 상경하여 조선 권번에서 활약하면서 여류 가야금 연주자로 널리 이름을 날렸다. 판소리는 김봉이(金鳳伊)·임방울(林芳蔚)·김정문(金正文) 등에게서 배웠고, 승무는 한성준(韓成俊)에게서 배웠다. 병창은 오태석(吳太石)·심상건(沈相健)·박동준(朴東俊)에게 배웠다.

1932년 22세에 결혼하면서 연주 활동을 중단하였지만,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경부터 일반인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며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 할아버지 김창조한성기로부터 배운 산조에다 새로 176장단과 무장단의 세산조시를 작곡하여 넣었다. 이것이 현재의 김죽파류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의 틀이다.

1956년에는 할아버지 김창조와는 유형이 다른 심상건류를 배웠으며, 1963년 한일섭(韓一燮)에게 아쟁 산조를 배웠다. 1979년 할아버지 김창조의 가락에 진양조 7장단, 중모리 4장단, 자진모리 4장단, 휘모리 51장단과 무장단의 일부분, 세산조시 7장단 등의 가락을 추가하였다. 이로써 약 55분에 이르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가 완성되었다.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이재숙(李在淑)·김정자(金靜子)·양승희(梁勝姬)·문재숙(文在淑) 등이 있다.

[활동 사항]

김죽파는 여덟 살 무렵부터 전주에서 기거하던 할아버지 김창조로부터 풍류 한바탕을 배웠다. 이때 배운 것이 잔령산부터 굿거리까지였다. 광주로 이사한 후에는 김창조가 타계할 때까지 풍류,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우며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라고 하는 김창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훗날 김죽파는 619가락의 산조를 재창조하는데, 그중 김창조의 가락이 112장단이나 들어 있다.

1919년 김창조가 사망하자 전근한 부친을 따라 황해도 남천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아버지 김낙권은 딸의 음악 공부를 극도로 싫어하여 김죽파는 할머니를 따라서 목포로 내려오게 되었다.

1920년 김죽파의 나이 열 살 때 할머니는 당시 『조선 일보』 지국장이었던 양기환을 양아버지로 정해 주었다. 양부모의 집에서 살게 된 김죽파는 양부모의 배려로 할아버지 김창조의 제자인 한성기로부터 본격적으로 가야금 산조를 배우게 되었다. 양부모는 한성기를 집으로 초빙하여 같은 집에 기거하도록 하면서 3년 동안 김죽파에게 가야금 산조, 병창, 풍류를 가르치게 하였다. 1922년~1923년에는 한성기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고 있던 김창환의 협률사에 참가하여 가야금 산조, 병창, 잡가 등을 공연하였다.

1923년 양부모를 따라 장흥읍으로 이사한 김죽파는 장흥면 건산리에 살고 있던 최옥삼 등의 연주가들과 교유하였다.

1926년도에 양부모집을 떠나 할머니를 모시고 상경해 조선 권번에서 김운선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다. 이때 임방울김정문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한성준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오태석, 심상건, 박동준으로부터 병창을 배워 남도 음악의 진수를 더욱 깊이 체득하였다. 김죽파는 당시 이웃에 살던 나의관의 사랑방에서 풍류를 연주하며 지용구, 이민택, 김옥경, 채석봉 등의 풍류객들과 어울렸다.

1930년 명창 대회에 출연, 가야금 산조를 연주해 큰 갈채를 받은 김죽파는 이듬해인 1931년에 경성 방송국 초청으로 김채련과 함께 출연하여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1933년에는 이승환으로부터 거문고 풍류를 배웠다.

1932년 결혼 이후 외부에서의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평범한 가정생활로 돌아갔으나 집에서 가야금, 거문고, 풍류, 가곡 등을 들으며 연주를 즐겼다. 1955년 무렵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야금을 가르치며 음악 활동을 재개했으며, 자신이 배운 김창조 산조나 한성기 산조에는 없는 단몰이 가락을 창작하여 세산조시라고 불렀다.

1968년 이후에는 국악을 전공하는 젊은 국악인들이 제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서울 대학교의 이재숙, 김정자 교수를 시작으로 양승희 등이 입문하였다. 1978년 1월 2일 국가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1989년 9월 10일 서울 고려 병원에서 직장암으로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31년 한성준의 반주로 산조 및 병창을 오케 레코드(Okeh Record)사에서 취입해 SP판으로 출반하였다. 1979년 성음사에서 LP판을 출반하였고, 1980년 문화재 보호 협회에서 『한국 전통 음악 대전집』 제13집을 출반하였다. 1985년 일본 도쿄에서 2회의 연주를 하였으며, 1988년 일본 킹 레코드사에서 가야금 산조 CD를 출반하였다. 1989년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연주하였으며, 같은 해 뿌리 깊은 나무사 제작으로 『가야금 산조 전집』을 출반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8년 국가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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