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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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堅 |
이칭/별칭 | 중실(仲實),신제(愼齊),근무(勤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송정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탁현진 |
출생 시기/일시 | 1565년 - 김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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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5년 - 김견 무과에 급체 |
몰년 시기/일시 | 1608년 - 김견 사망 |
사당|배향지 | 노동사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 | 주부 |
[정의]
조선 전기 영암 출신의 무신.
[개설]
김견(金堅)[1565~1608]은 영암군 서호면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고, 의주까지 왕의 가마를 호위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가계]
본관은 밀양, 자는 중실(仲實), 호는 신제(愼齊)이다. 할아버지는 김진(金軫), 아버지는 판관을 지낸 김광후(金光厚)이다. 무인 김홍발(金弘發)과 녹도 만호를 지낸 김경발(金景發)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견은 1585년(선조 1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고, 이후 주부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당항포 전투를 비롯하여 남해 싸움에서도 큰 공을 세웠으며, 어가(御駕)를 의주까지 호위하여 선조에게서 친필을 하사받았다. 첨정 벼슬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어가를 의주까지 호위하며 곁에서 왕을 잘 모신 공로를 인정받아 ‘천리근왕 손구구치(千里勤王損軀驅馳)’[천리 길을 걸어 왕을 보살핌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라는 여덟 글자를 선조에게서 하사받았다.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며, 사후에 근무(勤武)라는 시호가 함께 병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에 있는 노동사(蘆洞祠)에 아들 김경발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