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48 |
---|---|
한자 | 郭再祐 |
이칭/별칭 | 계수(季綬),망우당(忘憂堂),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선미 |
[정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의병장이자 영암에 유배 온 문신.
[개설]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인물이다. 정유재란 후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지체하고 사퇴한 일이 빌미가 되어 1600년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다.
[가계]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할아버지는 부사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곽재우의 선조는 중국 송(宋)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곽경(郭鏡)[1117~1179]이다.
[활동 사항]
곽재우는 1585년(선조 18) 치러진 별시(別試)에서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답안이 선조의 심기를 언짢게 해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으로 유곡 찰방, 형조 정랑, 절충장군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수비하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갔다. 1599년(선조 32)에 다시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한 달 뒤에야 임지에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향촌으로 낙향한 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다가 1617년(광해군 9)에 죽었다.
[학문과 저술]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왕에게 올린 소계(疏啓) 및 제문(祭文), 시(詩) 등을 수록한 『망우집(忘憂集)』이 전한다.
[묘소]
곽재우의 묘소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곽재우를 모신 사우(祠宇)에 예연 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709년(숙종 35)에는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