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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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得中 |
이칭/별칭 | 택부(擇夫),덕촌(德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아람 |
[정의]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학자.
[개설]
양득중(梁得中)[1665~1742]은 17세에 박태초(朴泰初)[1646~1702]의 문하에서 배우고 20세에 명재(明齎) 윤증(尹拯)[1629~1714]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1694년(숙종 20)에 조정에 천거되어 벼슬을 지냈다.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택부(擇夫), 호는 덕촌(德村)이다. 아버지는 양우주(梁禹疇)이고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6세손으로, 안방준(安邦俊)[1573~1654]의 외증손자이다.
[활동 사항]
양득중은 이세필(李世弼), 박세채(朴世采) 등과 학문을 토론하는 등 학자로서 명망이 높다가 1694년(숙종 20)에 천거를 받아 1697년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 공조 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다가, 1706년 회인 현감을 지낸 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위수·익찬, 김제 군수, 사헌부(司憲府)의 지평·장령·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양득중은 1734년(영조 10)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임명되었고, 수취 체제의 개선을 주장하며 실학으로의 학문 풍토를 개선할 것을 건의하는 한편, 탕평책을 통해 고질적 당파싸움을 없앨 것을 주장하며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주장과 시책을 비판하였다.
[학문과 저술]
양득중은 17세에 박태초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뒤에 윤증의 문하에 들었다. 1703년 공주 덕촌(德村)으로 이사하여 스승 윤증을 모시며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자로 이이규(李以圭)·이확(李濩) 등이 있다. 벼슬을 지내면서 실학으로의 학문 풍토 개선을 주장했으나, 성리학에도 밝아 『명대의변(明大義辯)』 등의 저술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저서로는 10권 5책의 『덕촌집(德村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