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6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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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征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연수 |
[정의]
1740년 채지홍이 강릉 등 관동 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쓴 기행문.
[개설]
채지홍(蔡之洪)[1683~1741]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자신의 호를 딴 『봉암집(鳳巖集)』을 남겼으며, 여기에 강원 영동 지역 기행문인 「동정기(東征記)」가 수록돼 있다. 채지홍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자신의 수양을 위한 실천적 학문에 더 힘썼기에 다른 학자들로부터도 추앙을 받았다. 「동정기」는 1740년 4월 1일 청풍을 출발하여 대관령~강릉~금강산을 경유하여 귀가하는 5월 10일까지의 일정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성]
「동정기」는 일정별로 기행문을 적기 전에 우리나라의 산들을 소개하는 글로 시작한다. "중국 사람도 '원컨대 동방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고 죽었으면 한다'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면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 산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수사(洙泗)[곡부현]에서 태어나 공자의 면모를 알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면서 금강산 기행에 나선 심정을 서문에 적고 있다.
1740년 4월 1일 관동 지역을 유람하기로 일행들과 약속한 후 일행 일부는 먼저 길을 나섰으며, 채지홍은 4일에 출발하여 청풍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제천읍 관저에서 잠을 잤다. 6일 평창, 7일 대화, 8일 월정사, 9일 횡계역을 거쳐 10일 대관령에 다다른다. 강릉 주변의 일정은 4월 10일부터 12일까지의 일정이다. 10일에는 대관령~오봉서원, 11일에는 송담서원~경포대~오죽헌, 12일에는 민 진사 집~연곡역을 경유하여 13일에는 양양으로 향한다.
14일 낙산사, 15일 신흥사와 청간정, 16일 간성군, 17일 고성, 18일 해금강~삼일포, 19일 사선정, 20일 금강산 옥류동~구룡연, 21일 유점사~용추, 23일 만폭동~장안사, 24일 옥경대, 25일 장안사로 다시 오기까지 금강산에서 여러 날을 체류한다. 26일 단발령~추정촌, 28일 금화읍, 29일 청화촌, 5월 1일 영평읍, 2일 포천에 도착한다. 3일부터는 기호 지방(畿湖地方)을 경유해 천천히 돌아서 7일 만인 5월 10일에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한다. 관동 지역 유람에 나선 동행으로는 윤봉구·한원진·권정성이 있다.
[내용]
「동정기」는 금강산 유람에 나선 채지홍의 기행문으로 금강산 풍물 외에도 강원 영동 지역의 풍경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740년 4월 10일 대관령에서 바라본 동쪽 바다를 일컬어 "일찍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이 '동해의 물은 푸르다. 이른바 '푸른 바다'는 동해를 가리켜 한 말이다'라고 했다는데, 참으로 그러하다"고 밝혔다. 대관령 산 중턱에는 두견화가 활짝 피고 나뭇잎은 새순이 돋았는데, "고개의 중턱 위로는 얼음과 눈이 얼어 있어서 찬 기운이 살을 에듯 추웠고, 꽃잎은 시들어 생기가 없었다"라면서 초여름의 대관령 꼭대기가 보여 주는 기후를 인상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면서 "영동 지역은 양(陽)을 향하고, 영서 지역은 음(陰)을 향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한편, 강릉의 오봉서원(五峰書院)에서 공자의 진영을 배알하는가 하면, "서원록(書院錄)을 찾아 보니 서로 잘라 내고 깎아 냈는데, 분명히 당쟁의 흔적이었다. 뜻밖에 명승의 고장에도 이런 습속의 폐단이 있으니, 진실로 혀를 찰 만했다"라면서 당쟁의 흔적을 읽고 개탄하기도 했다. 11일에는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율곡의 진영을 배알했으며, "서원 안에 사임당의 그림첩이 있다고 들었는데, 주인이 마침 출타하여 열람할 수 없었으니 안타까웠다"고 적었다.
아침을 먹고는 경포에 갔다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효자와 절부의 홍살문, 마을의 동쪽에 있는 충노문(忠奴門) 등을 보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하는 마음을 크게 불러일으켰다"고 감회를 적었다. 경포호수에서는 "깊고 얕음이 한결같아 군자지(君子池)라고도 부른다"라거나, 홍장암(紅粧巖)의 전설 등을 기록했다. 숙종이 지었다는 절구 두 수를 경포대에서 보고 "엎드려 두세 번 읽고 감격스러워 목이 메여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식의 충성스런 신하의 모습도 담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오죽헌과 해운정을 방문했는데, 해운정에서는 "오랫동안 앉았으니 마음과 눈이 맑아지는데, 어찌 굳이 주인에 대해 물어볼꼬"라는 시도 지었다.
오죽헌에서는 "사임당이 거처한 안방이 오죽헌 밖 오른쪽 옆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져 밭이 되었으니, 애석했다"라는 마음까지 적고 있다. 또 오죽헌 일대를 북평이라 일컫는데, "영동 지역의 고을은 원래 척박한 고장이나 대관령 아래만 토지가 비옥한데, 그 중에서도 북평은 더욱 기름지다고 일컬어졌다. 밭두둑이 서로 이어 있고 오곡이 무성하게 자라며 물고기와 소금 등 좋은 것들을 겸하고 있어, 백성들의 풍족함은 아홉 고을 가운데 으뜸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12일에는 연곡역을 지나 주곡촌에서 점심을 먹고 후평포로 갔다. 13일에 양양에 도착하여 낙산사와 의상대를 보았다.
[특징]
대관령, 경포호와 경포대, 오죽헌, 오봉서원와 송담서원, 율곡과 신사임당, 심언광 등 강릉의 풍광과 문화 유적, 강릉의 인물 등에 대한 인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청풍~제천~대관령~강릉~양양~고성~금강산~기호 지방을 둘러보는 40일간의 강원 영동 지역 기행 일정이 기행문답게 아침-점심-저녁으로 시간을 나눠 이동 장소 순으로 기록한다. 대관령이나 경포대 혹은 오죽헌이나 오봉서원처럼 특별한 장소에 대해서는 채지홍의 시선으로 다양한 평가를 내리거나 아쉬운 마음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안방이 사라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라든가, 서원록의 흔적을 통해 강릉지역 내에서 당쟁의 흔적을 보고 안타까워한 점은 채지홍이 강릉지역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채지홍의 「동정기」는 강릉지역의 옛 흔적을 찾아 보는 좋은 자료이다. 채지홍이 금강산 유람을 위해 떠난 여행이기에 금강산에 대한 기록은 강릉지역 내용보다 일정도 길고, 기록도 더 상세하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릉지역의 내용들이 채지홍의 「동정기」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강릉지역의 기록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채지홍의 「동정기」는 『봉암집』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2019년에 간행된 『금강산 유람록』[민속원]을 통해서도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본을 함께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