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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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原小京 |
영어의미역 | Secondary Capital of Bug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대길 |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특별행정구역.
[개설]
신라시대에는 지방제도로서 주군제도와는 별도로 특수행정구역으로 왕경을 모방한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소경은 주로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주군을 견제·감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정배경 및 목적]
통일신라의 지방통치조직은 삼국통일에 따른 영토의 확대로 개편·확대·정비되었으며, 685년에 9주 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 방향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제정경위]
소경제는 514년에 아시촌 소경(阿尸村 小京 : 위치에 대하여는 안강(安康)·함안(咸安)·의성(義城) 등이 있음)을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557년(진흥왕 18)에 국원소경(國原小京)[지금의 충청북도 충주(忠州)]을 설치하고, 639년(선덕여왕 8) 하슬라(何瑟羅)에 북원소경(北原小京)[지금의 강원도 강릉(江陵)]을 두었으며, 금관소경을 680년(문무왕 20)에, 서원소경을 685년(신문왕 5)에 각각 설치하였다.
[관련기록]
북원소경에 대한 공식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용]
행정영역은 현(縣) 정도의 규모로 소경의 내부에도 그 중심부에는 수도를 축소·모방한 6부로 나뉘어져 질서정연한 도시구획이 설정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피난용 산성이 배치되어 있었다. 북원소경에는 장관에 해당하는 사신(仕臣) 또는 사대등(仕大等)과 이들을 도와 일하는 사대사(仕大舍) 등의 관료가 있었다. 또한 북원소경에는 토착민과 사민이 되어 온 왕경 사람들과 다른 지방민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지방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가졌다.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는 북원소경의 주된 생산을 담당하였던 직할촌들이 산성을 중심으로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관원으로는 장관인 사신(仕臣)과 그 속관인 사대사(仕大舍)가 있어서 관내의 행정, 치안, 군사, 세금 징수 등의 역할을 하였다.
[변천]
강릉의 북원소경은 말갈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기 때문에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658년에 폐지되고 주(州)로 환원시켰다. 대신 지금의 삼척 지역에 해당되는 실직(悉直)에 군사적 거점단위의 성격을 가진 북진을 설치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소경은 군사적 위협이 높아 안보상 불안정한 곳에는 설치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통일기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각급 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든 대신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었다는 데서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신라가 약 1세기 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