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마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뒤에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楸谷]이라는 설이 있으나 가래나무는 안산 지역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추(楸)’자를 같이 쓰는 개오동나무, 호두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또는 들의 가장자리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갈래길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안산군 잉화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에...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혈(臥牛穴)이므로 각골[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코끼리 형상이라 하여 상봉(象峯)이라 했고, 마을 이름은 상촌(象村)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던 전주이씨 가승(家乘)[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가계를 간단히 기록한 책]에는 가골[佳谷]로 기록되어 있다. 각골마을에...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에 있는 산의 형태가 말머리 모양이고 그 앞에는 작은 우물이 있는데, 목마른 말이 이 우물물을 먹고 갈증을 풀었다 하여 갈마지(渴馬地)라 하였다. 갈마지가 있는 대부도는 삼국시대에 마한(馬韓), 통일신라시대에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조선시대에는 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으며, 인조 때는 방어사...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는 자연마을.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으며,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감대골[柿竹谷]로 불리다가, 후대에 음이 변하여 감자골이 되었다. 감자골의 세거성씨였던 양주최씨의 옛 족보에는 선대들의 묘를 시죽동(柿竹洞)에 썼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사동은 신도시 개발 전에는 화성군 양감면 면장보다 사리[현 사동]이장을 한다고 할 만큼 화성군 관내에서...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釜]를 엎어 놓은 형국이어서 가마산[伏釜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이곳에 취락이 형성되자 산 이름을 따서 가마골이라 하였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개멸[元釜谷]로 통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북쪽 지역이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만수동(萬樹洞)이라 불렀고, 동쪽 지역이 골짜기 안에 위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던 자연마을. 오래전 서해안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수암동과 장상동 사이 안산천 위에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갯다리[介橋]라 하였다. 그 후 다리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갯다리라 하였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산군 산천조에 개교천(介橋川)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 있던 자연마을. 건건동의 끝자락인 용담뿌리 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건건동의 끝이라 하여 건지미(乾之尾)라고 했으나, 용담뿌리에 주막이 생기면서 맛 ‘미(味)’자를 써서 건지미(乾之味)라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북방면 건건리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북방면 건건리가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에 큰 향나무가 있었다 하여 계향동(桂香洞)이라 하였다. 점섬 산 너머에 위치하여 등너머라 부르기도 하였다. 2008년 점섬에 있는 화림선원(華林禪院) 화단에서 화림선원의 옛 이름인 약수암 초석이 발견되었는데 ‘계향산(桂香山) 약수암(藥水庵)’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걸로 보아 계향산에서 이름을 따 계향동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동에 있는 자연마을. 대부도의 중심지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고유지라 불렀다. 행정동은 대부동 관할이며 동1리를 고유지라고 부른다. 고유지에 있는 자연지명 중 비선거리는 대부도가 남양부에 속하였을 때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와 감목관(監牧官) 등의 선정비를 세워 놓았던 곳인데, 도로 확장 공사로 대부동사무소 마...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있는 자연마을. 고주물은 밀양박씨가 처음 터를 잡은 마을로, 안산시 화정영어마을[옛 화정초등학교] 앞에 있는 우물이 풍수로 보아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梅花落地形]이고, 오랜 옛날 이곳에서 선화(仙花)라는 꽃이 피어서 꽃우물이라 했으며, 또한 매화꽃이 피었다 하여 꽃우물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 꽃우물이라 하였는데, 점차...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원래의 산 이름은 갓모산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갓 ‘관(冠)’자와 모자 ‘모(帽)’자를 써서 관모산이라고 하였다. 초지동에 있는 관산초등학교 뒷산이 관모산인데, 관모산 서쪽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자 이 산 이름을 딴 것이다. 관모산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북쪽 지역[현 주공아파트 5단지]은 아랫말, 남쪽 지역[현 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남동에 있던 자연마을. 해적들이 대부도를 침범하여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적선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망선리(望船里)라 하였고,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망생이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망선리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여 흥성리(興成里)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부도와 선재도를 잇는 선재대교가 시작되는 해변 마을로 대부남동 남5통 지역의 일부이다. 바닷가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동쪽 연암사(延岩寺) 법당 뒤에 남사바위(南蛇바위)가 있는데, 남사바위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사박이라 하였다. 6·25전쟁 후 황해도 해주 출신의 해주오씨(海州吳氏) 등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고, 1973년 취락 구조 개선 사업으로 마을이 말끔히 단장되었다. 1989년 시흥시 수암동의 일부가 되었다가, 1995년...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에 있는 자연마을. 남산뜰[南山坪]은 좁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뒤쪽 상부와는 달리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이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하자 갑자기 우뢰산(雨雷山)이 울면서 밀려와 지금의 위치[반월저수지 북쪽]에 머물러 도읍지 이전 계획을 멈추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광주군에 속하였다가 1906년 안산군 북...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하산 아래[남쪽]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넓은골[廣谷]이라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너빌이 되었다. 너빌은 김녕김씨(金寧金氏) 집성촌으로 김성동(金姓洞)이라고도 한다. 마을 중앙에서 보아 동남쪽 지역을 건넌말, 서쪽 지역을 아랫말, 동쪽 지역을 웃말, 서북쪽 지역을 뒷말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에 있는 노리울[獐谷]이라는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노리울은 ‘느리다’, ‘완만하다’의 옛말인 ‘노루’에서 비롯된 지명이며, 한자로는 노루 ‘장(獐)’자를 써서 장곡(獐谷)이라고 한다. 또는 마을 뒤 고깔봉에서 마을에 이르는 산세가 풍수로 보아 노루의 입처럼 생겨[獐口穴] 노리울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고구려 때 장항구현(獐項口...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시대 초기 마을 서남쪽 봉화재산 정상에 봉화대(烽火臺)[무응고리봉수]를 설치했다 하여 적길리(赤吉里)라 하였다가,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묘를 목내동 능안에 쓴 후부터는 능(陵)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능길’이 되었다. 마을의 서쪽 지역은 바라지, 북쪽 지역은 골안, 마을 중앙은 큰말이라 불렀다. 능길은 곡부공씨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 있던 자연마을. 능안[陵內]은 조선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묘를 아랫말과 성곡동 무들 사이[안산시 목내동 산47]에 쓰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 능은 세조 때에 파괴되었고, 중종 때 양주 현릉(顯陵)으로 천장하였다. 능안의 북쪽 지역은 웃말, 남쪽 지역은 아랫말이라 하였다. 능안은 현덕왕후의 묘를 쓴 후부터 널리 알려졌다. 이후 전주이...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에 있던 자연마을. 본래의 이름은 월입피(月入陂)로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언덕바지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다리피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1논줄[지금의 시흥시 논곡동 논줄] 2다리피’라고 할 만큼 안산에서는 명성이 높았던 마을이었고, 월입피주막이 유명하였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마을 동북쪽에 있는 도당산에서 당제를 지냈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달미는 교통의 요충지로 동쪽은 시흥시 화정동, 서쪽은 시흥시 거모동, 남쪽은 안산시 와동, 북쪽은 시흥시 능곡동 등과 연결되는 사통팔달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달뫼[達山]’라 하였다가 음이 변하여 달미가 되었다. 달미에는 나주나씨, 진주강씨, 순흥안씨, 교하노씨 등이 세거하였으며, 마을의 동쪽 지역은 건넌말, 남쪽 지역은 아랫말,...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이동에 있던 자연마을. 샛골 남쪽에 있던 마을로, 샛골에서 이곳으로 가자면 남쪽에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는 쪽박산 능선을 넘어야 했으므로 담너머[澹園]라고 하였다. 현재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이 들어서 옛 농촌 마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마을 경계도 알 수 없으며, 쪽박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새젓골과 태을 사이에 있던 마을로 논밭이 많아 대장(大壯)[많은 논밭]이라고 부르다가 대쟁이·대재이로 변음이 되었다. 대쟁이는 예전 군자면(君子面) 주민들이 서울·인천·안양 등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주막이 번성하였다. 대쟁이가 있었던 선부동은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대월면(大月面)...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해안가에 있던 마을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이곳에 이르러 급히 돌아가므로 도란말[廻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두리는 잿머리[城頭]라 하여 골우물·벌말·안말·도란말을 총칭하는데, 이는 도란말에 있는 성황당을 신성시하여 주변에 성(城)을 쌓고 마을 주민들이 대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안산에 전래되던 동제(洞祭) 대부분은 폐동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던 자연마을. 고잔역 서남쪽 논 가운데에 마치 섬처럼 자리 잡고 있던 마을로, 1910년대 고잔동을 측량할 때 고잔동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비만 오면 질퍽해지므로 화성군 남양 지역을 측량할 때 함께 실시한다고 도로 환원하였다 하여 도리섬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육지처럼 되며 물이 돌아들었다 하여 도...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에 있는 자연마을. 동막골은 고구려 때 안산군 관아가 있던 노리울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회관 동쪽 지역은 웃말, 서쪽 지역은 아랫말, 고깔봉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은 양단말이라 부른다. 안산김씨가 처음 세거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 동곡리(東谷里)였다. 2009년 3월 현재 안산김씨는...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1635~1718]의 사당이 있었으므로 윤지완의 아호를 따서 동산골[東山谷]이라 불렀다. 윤지완의 묘는 본래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있었는데, 그곳에 묘를 쓴 뒤 서해안의 조기가 잡히지 않자 어부들이 상소해 개성 천마산으로 옮겼다. 그 후 윤지완의 후손인 파평윤씨 문중에서 묘소...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있던 자연마을. 왜두둘기 북쪽에 있던 동장리는 본래 가자골과 새말을 통칭해 동작리라 불렀는데,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마을 동북쪽에 있던 봉황산이 풍수로 보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공작리(孔雀里)라 하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동작리(銅雀里)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마을이 길게 생겼으므로 동장리(洞長里)라 하였다고...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있던 자연마을. 큰백중 동북쪽에 있던 마을로 군사상 요새지여서 고려 때부터 둔전(屯田)[군량 또는 관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가 지급한 토지]과 둔전병(屯田兵)[군사상 중요지이거나 또는 군대들이 오래 머무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병졸]이 경작하던 논배미가 있었으므로 둔배미라 불렀다고 한다. 또 초지동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원당(元堂)...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과 선부동에 걸쳐 있던 자연마을. 띠[모초(茅草). 벼과의 다년초로 보통 삘기라고 한다. 우장 만드는 데 많이 쓰인다]가 많이 자생하여 띠골[茅谷]이라 하였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변음이 되어 땟골이 되었다. 고려 말엽 왜구를 격파하여 큰 공을 세운 무신 오언(吳彦)의 묘를 현재의 원곡고등학교 뒤에 쓴 후 오언의 후손인 동복오씨(同福吳氏)가 묘 아래쪽에 세...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던 자연마을. 바다에 돌출된 땅 끝에 있는 마을이었므로 막고지[莫串]라 불렀다. 북쪽에는 산우물이 있었고, 남쪽에는 샘골이 있었다. 상록구 사동과 본오동 경계에 자리 잡았던 마을로, 신도시 개발 전 막고지는 사리[현 상록구 사동]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상록구 본오동 지역에 속한다. 막고지는 전주이씨와 풍양조씨 등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남쪽에...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에 들이 없어 무들[無坪]이라 불렀다. 마을의 남쪽 지역을 큰무들, 북쪽 지역을 작은무들이라 불렀고, 동쪽 지역은 목내동 능안 너머에 있으므로 능너머라 불렀다. 무들이 있던 성곡동은 조선시대에 안산군 와리면(瓦里面) 무곡리(茂谷里)와 성두리(城頭里)였다가 1914년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城谷里)가 되었고, 1986년 1월 1일 안산...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에 있는 자연마을. 구봉염전 쪽에 있는 서의산으로부터 바다로 길게 뻗어 나간 끝 지점으로 디딜방아의 방아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71년 제작된 대부도 지도에는 한문으로 방아찧을 ‘용(舂)’자를 써서 용두포(舂頭浦)로 표기되어 있다. 약 150년 전부터 배씨, 최씨, 강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대부도와 떨어진 섬이었으나 약 60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 있던 자연마을. 능안 서쪽에 있던 마을로 돌배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배나무라 하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배나물로 되었다고 한다. 남쪽 지역은 큰말, 북쪽 지역은 작은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안산군 와리면 이목리(梨木里) 지역이었다. 전주이씨, 안동김씨 등의 세거지로 1979년 폐동 때 60여 호가 거주하였다. 지금은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시대에 바닷물이 큰뱅골[船谷]까지 이르러 배가 닿았다 하여 배 ‘선(船)’자를 따서 배골[船谷]이라 하였는데, 후대에 이르러 뱅골이 되었다. 『전의이씨족보』에는 이골[梨谷]로 기록되어 있다. 큰뱅골에서 마을 북쪽 지역은 웃말, 동남쪽 지역은 건넌말, 서쪽 지역은 아랫말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와리면 선곡리라 하였다. 조선...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시대 중엽 마을 동쪽 연안으로 배[梨]가 들어왔다 하여 배옷[梨湖]이라 하였고, 포구는 이호포(梨湖浦)라 불렀다. 마을 북쪽 지역을 웃말, 서남쪽 지역을 아랫말, 동남쪽 지역을 동끝, 동북쪽 지역을 우중굴이라 불렀다. 본오동은 조선시대에 성곶면의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1리~4리는 쉽게 마을 명칭이 결정되었으나 배옷 주민들과 선암동(...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풍수로 보아 백 가지 성(姓)이 살 곳이라 하여 백성말[百姓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1979년 반월공업단지 조성과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폐동되면서 원주민을 위한 이주 단지가 조성되어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현재 원주민은 다시 이주하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국경없는마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하동에 있는 자연마을. 넓은 들판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벌말[坪村]이라 하였다. 본래 벌말과 개다리 사이에 마을이 있었는데,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넓은 벌판이 되자 조선 말엽 곤양배씨(昆陽裵氏), 풍양조씨(豊壤趙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등이 차례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벌말이 있던 장하동은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 장하리(獐...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원래 들이 넓어 밭을 가는 농부가 소를 크게 꾸짖는다는 뜻으로 질우지(叱牛地) 또는 기로지(耆老地)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 부곡리(釜谷里)와 신리(新里)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안양시 안양3동 후두미에 살던 유원형(柳元馨)이 농사를 짓기 위해 옮겨 정착한 뒤 개멸·시랑골 등에 살던 주민들이...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시동에 있던 자연마을. 초지동 하나골 서쪽에 있던 마을로 풍수로 보아 마을 뒤에 있는 안산(安山)이 범[虎]이 동쪽을 곧게 내려다보는 형상이라 하여 범직(凡直)이라 하였다. ‘범(凡)’은 ‘범 호(虎)’자의 뜻을 소리 나는 대로 음을 빌려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해김씨 참판공파 가전(家傳)에 따르면, 조선 현종 때 김해김씨 금녕군의 12세손인 김무승(金武承...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에 있던 자연마을.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염벗을 만들어 소금을 굽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벗말이라 하였다. 특히, 현재의 북1리와 북5리 일대를 상동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이곳에 남양부사와 절도사 등이 주재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는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에 있던 자연마을. 다리피 동남쪽에 있던 마을로 구전에 따르면,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산세가 안정감을 주어 마치 노적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노적봉(露積峯)이라 하였고, 뒷산[지금의 부원빌라 동쪽]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어 말미산이라 불렀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초계정씨의 선산으로 1989년 양궁경기장이 들어섰다]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즉...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삼밭과 항가울 사이에 있던 마을로 골짜기 전체가 흙이 부드럽고 고와서 분대(粉垈)라고 하였다. 조선 연산군 때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통덕랑에 재임 중인 최혼(崔渾)이 낙향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최혼의 양주최씨 후손들이 긴곳·삼밭·초당·감자골 등지로 분가하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1979년 폐동 당시 19호의 민가가 있었...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있던 자연마을. 풀이 자생할 수 없을 만큼 토질이 붉고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 뒷산이 마치 섬처럼 보여 붉은섬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앞에는 유명한 붉은섬 낚시터가 있었다. 붉은섬은 조구나리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1962년 이은구[김포 출신]·최구완[황해도 출신]·원충희[당진 출신]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붉은섬이 있었던 이동(二洞)...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칠보산 자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토질이 운모[돌비늘]가 많이 섞여 반짝거리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늘치골짜기는 깊고 풍경이 아름다워 안산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비늘치가 있던 사사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廣州郡) 월곡면(月谷面) 사사리(沙士里)였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월곡면 사사리가 되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사질이는 사사리(沙士里)의 옛 이름으로 지역에 반짝이는 모래[운모]가 많고,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질이는 186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월곡면 사사리라 했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따라 안산군 월곡면 사사리가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던 자연마을.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형상이 우물과 같다 하여 산우물[山井]이라 하였다. 본오동에 속하기 전에는 사동에 속한 마을로 막고지 북쪽에 있었다. 광산김씨, 전주이씨, 풍양조씨, 김해김씨, 의령남씨 등이 세거하였고 특히 전주이씨가 번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당(書堂)이 있었을 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 1987년 신도시 건설 때 2...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이리(二里)와 사리(四里) 사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삼리(三里)라 하였다. 마을 북쪽은 아랫말, 남쪽은 웃말, 동쪽은 한우물이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샘골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밀양박씨가 정착한 이래 양주최씨, 김해김씨 등이 세거하였다. 조선시대에 광주군(廣州郡) 성곶면(聲串面) 삼리(三里)라 하였고, 1906년 9월 24일...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 있는 자연마을. 마을 주변으로 세 개의 골짜기[막골, 소[우]물골, 텃골]가 내 ‘천(川)’자 모양으로 뻗어 있어 삼천리(三川里)라 하였다고 한다. 막골, 텃골, 메골 등 세 개의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하나의 하천으로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우물이 세 군데 있어 샘 ‘천(泉)’자를 써서 삼천리(三泉里)라는 설, 언젠가는 삼천 가구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던 자연마을. 바닷가가 가까우면서도 샘이 많이 나고 물맛이 짜지 않고 아주 좋아서 샘골[泉谷]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화성군 반월면에서 수질 검사를 한 결과 이 마을 우물의 수질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 말엽 남양홍씨 문희공파(文僖公派) 23세손인 홍의경(洪義卿)이 처음으로 정착한 이래 후손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폐동 당시 남아 있던 4...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는 자연마을. 풍수로 보아 마을 형상이 소의 뿔처럼 생겼다 하여 샛뿔[新角]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정길섭(丁吉燮)[정봉진 전 안산문화원장 조부]이 이곳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면서 새 학문을 익혀 깨달아야 잘살 수 있다는 의미로 ‘깨달을 각(覺)’자를 써서 ‘샛뿔[新覺]’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샛뿔은 능길과 시흥시 거모동 도일 사이에 있는...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에 있던 큰 돌 하나가 멀리서 보면 마치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여 석삼말[石三村]이라 하였다. 호동초등학교와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있던 마을로, 1977년 폐동 때 모두 7가구가 있었는데 4가구는 일동에, 3가구는 이동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호동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4차선 도로와 성호공원이 들어서 있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 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김정경(金定卿)[1345~1419]의 손자인 김맹전(金孟銓)의 묘를 만들면서 묘 앞에 세울 빗돌[碑石]을 배편으로 옮겨 와 이곳에서 직접 석수장이들이 돌을 깎아 세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미울 동쪽 마을로 안산김씨[또는 연성김씨]의 세거지이다. 김맹전의 묘를 쓴 후...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초입에서 구라 사이에 있는 산에 흰 차돌[일명 쉰돌박이]이 많이 박혀 있고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하여, 차돌에서 ‘석(石)’자를 취하고 바다에서 ‘호(湖)’자를 취하여 석호(石湖)라 불렀다고 한다. 뒷골 서쪽에 있던 마을로 양주최씨와 김해김씨 등의 세거지였다. 1979년 폐동...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옛날 선녀가 하강한 마을이라 하여 선녀마을이라고 하다가, 선부리[선부동]로 바뀌었다. 선부동은 달미(達美)라고도 하였는데, 선녀들이 목욕한 석수골 우물물에서 목욕을 하면 미인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가 되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에 있는 자연마을. 지형이 풍수지리상 선학혈(仙鶴穴)에 해당하고, 194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마을 노송 지대에 백로 떼가 모여들어 신선과 학들의 서식처와 같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선학골저수지가 낚시터로 바뀌고 전원 음식점이 몇 개 들어섰을 뿐 지금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진입로도 여전히 농로 수준이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에 있던 자연마을. 지금의 스타프라자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남쪽으로 약 400m에 이르는 곳이 마을의 나루터[성머리나루터]였는데, 풍수로 보아 성포리[지금의 성포동] 머리 부분에 해당하므로 성머리[聲頭]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포리는 어업의 전진 기지로,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부들의 소리가 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잔동 태봉과 독주골...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던 자연마을. 목내산성(木內山城) 안에 있는 마을이므로 성안[城內]이라 하였다. 본래 풍전에 속했던 마을로 처음 안동권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1979년 반월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폐동될 때에는 20여 호 남짓한 민가가 있었다. 현재 한국전력변전소 등이 들어서 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이웃이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을 포구에 조깃배가 많이 들어왔고 조기가 많이 잡힌다 하여 조기나루, 또는 조구나리라고도 하였다. 송호(松湖)라는 이름도 있고, 1980년 취락 구조를 개선한 마을이라 하여 일명 ‘취락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솔이웃은 성포동 성머리나루와 함께 어업의 전진 기지 구실을 하였으나,...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시동에 있던 자연마을. 예로부터 모내기 철만 되면 비가 와 연년세세 풍년이 든다고 하여 시꿀[時雨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꿀 서북쪽은 웃말, 동북쪽은 서런말, 동쪽은 우덕골, 동남쪽은 사탯말, 서남쪽은 논말, 북쪽은 양지촌이라 불렀다. 범직이 동쪽에 있던 시꿀은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시우리(時雨里) 지역이었다. 남양홍씨·밀양박씨·청주한...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딸 정정옹주(貞正翁主)와 남편인 진안위(晋安尉) 유적의 합장묘가 부곡동 동쪽 산기슭[제일스포츠센터 앞]에 있는데, 유적이 생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했다 하여 시랑골[侍郞谷]이라 하였다. 시랑골은 신촌과 시랑운동장[전 양궁경기장] 사이에 있던 마을로 유시행(柳時行)의 후손인 진주유씨의 세거지이다. 진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동에 있는 자연마을. 조선 말기 육지에서 이주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자를 크게 짓고 신당(神塘)이라 명명한 뒤로 마을 이름도 신당리[新塘谷]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마을에 안방죽·새방죽 등으로 불리는 방죽이 있어 당(塘)자를 ‘연못’이 아닌 ‘방죽’의 의미로 풀이하면 ‘새 방죽을 쌓은 동네’, 즉 신당리가 된다는 설도 있다. 신당리에는 다음과 같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있던 자연마을. 초지동 둔배미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둔배미에 딸린 마을이었다. 신촌은 6·25전쟁 직후 황해도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대 초에 신도시 개발로 폐동되어 당시 살던 4가구가 모두 이주하였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고잔신도시 개발 때에 원당마을이라는 전원주택 단지가 조성되었고, 원당마을 앞...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던 자연마을.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쑥 들어간 갯고랑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쑥께라고 하였다. 달미와 화정동 사이에 있던 마을로, 조선 말엽 최참봉(崔參奉)이란 사람이 처음 옮겨 와 살았다고 한다. 최참봉이 살던 집은 일제강점기에 수암동·거모동 간 도로 확장 공사 때 헐렸고, 일제강점기 말엽 민가 5가구가 터를 잡았다. 6·25전쟁 전만 해...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에 있는 자연마을. 시흥시 장하동 원뒤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로 웃버대 아래에 있어 아랫버대[下楊垈]라고 한다. 웃버대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강징(姜澂)[1466~1536]의 묘가 풍수로 보아 꾀꼬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집을 짓고 사는 앵소유기(鶯巢柳技) 형국이므로 마을 하천 둑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은 뒤로 마을을 ‘버들촌’이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던 자연마을. 웃말 동쪽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있다 하여 안골[內谷]이라 하였다. 안골은 단성이씨 누대의 세거지로 1989년 폐동 당시 20여 호가 있었으나 모두 이주하고 현재는 안산1대학이 들어서 있다. 조선 말엽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이조판서를 지낸 김수근(金洙根)[1798~1854]과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金炳國)[1825~1905] 등의 묘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있던 자연마을. 광덕산(廣德山)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압술 또는 압실, 전촌(前村)이라 하였다. 압술의 북쪽 지역은 아랫말, 남쪽 지역은 웃말, 아랫말 남쪽 지역은 안터라 불렀다. 압술은 와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마을이다. 압술이 있던 와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잉화면 와상리와 와하리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신도시 개발 당시 안산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백성말 동쪽에 있던 마을이다.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어 양지마을[陽谷, 陽地]이라 하였다. 동서로 길게 형성된 마을로 동쪽 지역인 중소기업연수원 입구 지역을 아랫말, 원곡1동사무소가 있는 서쪽 지역을 웃말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원상리(元上里)에 속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는 자연마을. 칠보산 아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양짓말[陽村]이라 하였다. 마을 가장 위쪽에 있고 예전에는 양반들이 많이 살아서 상촌(上村)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양짓말은 수인산업도로로 양분되어 있으며 현대아파트와 연립 주택이 들어서 있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마을에 침입한 왜인(倭人)을 두들겨 물리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왜두둘기는 본래 압술에 속했던 마을로 압술과 동작리 사이에 있었다. 왜두둘기에는 임씨가 정착한 이래 고성이씨, 안산김씨 등이 세거해 오다가 1987년 안산 신도시계획에 따라 당시 거주하던 28가구 대부분은 와동의 새로...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있는 자연마을. 동쪽은 오봉산, 남쪽은 안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우산처럼 둥근 지형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우산(于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산모퉁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우산(隅山)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대쟁이를 아랫말, 우산이를 웃말이라 부를 만큼 대쟁이와 한 마을로 불렸다. 우산이는 대쟁이 동북쪽에 있다. 안산신도시 개발 이전...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에 있는 자연마을. 웃버대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강징(姜澂)[1466~1536]의 묘가 풍수로 보아 꾀꼬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집을 짓고 사는 앵소유지(鶯巢柳枝) 형국이므로 마을 하천 둑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은 뒤로 마을을 ‘버들촌’이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버들촌의 위쪽에 해당하므로 웃버대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 해도 버드나무가 많았으나 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잿머리는 성두리(城頭里)라고도 하였는데, 도란말, 안말, 골우물의 세 마을을 아울러 이르는 명칭이다. 성두리는 도란말에 있는 성황당을 신성시하여 주변에 성(城)을 쌓고 마을 주민들이 대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성곡동은 성두리[잿머리]의 ‘성(城)’자와 무곡리[무들]의 ‘곡(谷)’자에서 한 자씩 따 온 이름이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던 자연마을. 아주 먼 옛날 이 마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던 노파가 두 아들이 잘되게 해 달라고 집 앞 고갯마루에 있는 성황당에서 1년 동안 치성을 드렸다. 하루는 노파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어느 곳의 땅을 파 보라고 하므로 일러 준 대로 하니 땅속에서 황금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로 이 마을을 적금(積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수많은 사람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에 있던 자연마을.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 이곳에서 별을 관측하였다 하여 첨성(瞻星)이라 하였다가 이익이 세상을 떠난 뒤 미신의 의미가 내포된 점성(占星)으로 바뀌었다. 이익이 살던 동쪽 지역은 탑이 있던 곳이라 하여 탑골[塔洞], 남쪽 지역은 아랫말, 서쪽 지역은 건넌말이라 불렀다. 조선 성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손(李繼孫)[1423...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던 자연마을. 부곡동의 벌터와 신촌 사이에 있던 마을로,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유명현(柳命賢)[1643~1703]이 현 안산시 정수장 밑에 살았으므로 유명현의 아호를 따서 정재골[靜齋谷]이라 하였다. 유명현의 아들로 안동판관을 지낸 유래(柳徠)[1687~?]가 이곳에 사당을 지은 후[일제강점기 중엽에 폐사] 후손인 진주유씨들이 세거하면서 마...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에 있는 자연마을.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 마을에 잠시 머물러 신하에게, 저 앞에 보이는 우거진 숲 속에 우물이 있을 것 같으니 물을 찾아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신하가 황급히 그곳에 들어가 찾아보니 과연 조그만 우물이 있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단숨에 물을 마시고는 이 우물을 왕지정이라 칭하고 기념으로 쇠로 만든...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남동에 있는 자연마을. 대부도 남쪽 중앙부에서 남동쪽으로 반도처럼 돌출한 지역으로 1871년 작성된 대부도 지도에는 말부흥(末富興) 끝에 부항포(浮缸浦)라고 표기된 것으로 미루어 부항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항포는 물 위에 떠 있는 항아리[또는 병] 모양의 포구라는 뜻이다. 『옹진군지』에는 산이 부엉이처럼 생겼다 하여 큰부엉이·작은부엉이라고 불렀고...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2동에 있던 자연마을. 고잔2동에 있는 자연마을로는 너머고잔, 당골, 마실, 태봉 등이 있다. 마실은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특이하고 명당이라 하여 예로부터 전국 각처의 지관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장차 큰 대궐이 들어선다고 예언이 자자했던 곳으로 지금의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안산시청이 들어섰다. 중앙동의 현 지명인 고잔2동은 조...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는 자연마을. 고려시대에 마을 뒷산 중턱에 있던 절에서 한 승려가 수도하다가 지장보살을 친견(親見)했다 하여 이 절을 지장사(地藏寺)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 안산여단 터 아래쪽으로 연암사(延岩寺) 동쪽 수암저수지 위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약 30가구가 살았으나 수암저수지가 생기고 모 인사의 별장이 들어서면서 주위 땅을 매입하여 2...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동에 있는 자연마을. 진두는 시화호가 형성되기 전 대부도에서 가장 큰 포구로 대부도의 관문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룻께라고도 한다. 대부도 동쪽 선감도를 마주보고 있었으나 시화호가 생기면서 대선방조제로 선감도와 이어졌고, 시화방조제로 대부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포구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배가 드나들던 바다는 간석지로 변모하였다. 2009년 3월 현재 2...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시대 초부터 고을 일대의 양곡[또는 군량미]을 저장하던 창고가 설치되어 있어 창마을, 즉 창말[倉村]이라 하였다. 건건동 353번지의 농지는 지금도 창밭[倉田]이라고 한다. 땅을 파면 불에 탄 벼 알갱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창말에는 현재 대림아파트와 안산창촌초등학교가 들어섰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있던 자연마을. 작은별망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 원초지(元草芝)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이를 사곶영(沙串營) 또는 초지량영(草芝梁營)이라 불렀다. 1656년(효종 7) 강화도로 옮긴 뒤 원초지의 진을 1초지, 강화도의 진을 2초지라 하였다. 원초지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형상이어서 남쪽 지역은...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있던 자연마을. 조선시대에 초지진에 주둔하여 망을 보던 별망군들의 망루가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삼국시대에 어부의 아내가 마을 산에 올라 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을 만난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이에 여인 또한 이곳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 산을 별망산(別望山)이라...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던 자연마을. 마을 서북쪽 산 정상에 고려 때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이 산을 태봉(胎封, 胎峯)이라 하였는데, 그 후 산 아래 마을이 생기자 마을 이름도 태봉이라 하였다. 당골과 마실 사이에 있었으며 파평윤씨, 풍양조씨 등 모두 11가구가 살았다. 1979년 신도시 개발로 폐동되고 지금은 주공아파트 8단지가 들어섰다....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던 자연마을. 일제강점기에 조근호라는 사람이 능길과 터진목 사이의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었는데, 토질이 모래 성분이 많아 큰비가 내리면 둑이 자주 터지므로 터진목이라 하였다고 한다. 능길 서쪽에 있던 마을로 광복 전에는 솥점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낚시터로 몰리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신길간이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시화신도시로 진입하는 도로...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에 있던 자연마을. 본래의 마을 이름은 단풍나무가 많아 풍전(楓田)이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풍년 ‘풍(豊)’자로 기록하면서부터 풍전(豊田)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해주정씨족보(海州鄭氏族譜)』에도 이곳을 풍전(楓田)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5년에 세워진 국민학교 이름도 풍곡국민학교[지금의 안산원곡초등학교]이고, 해주정씨 후손 가운데 학자...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남동에 있는 자연마을. 대부도 남쪽의 끝 뿌리이므로 흘곶(訖串)이라고 한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긴 고래뿌리, 쪽박솔섬뿌리, 메추리섬뿌리, 서근여, 강거래뿌리 등이 바다로 뻗어 나가 있다. 1871년 제작된 대부도 지도에도 흘곶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된 마을로 여겨진다. 흘곶동에는 주로 논과 밭이 많았고 굴 양식이 성행하였으나 지금은 주민 대부분...
고지명
-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에 속하였던 석곡동과 거모포의 옛 지명. 거무개는 현재 경기도 시흥시 관할로 동쪽과 남쪽으로 안산시와 접하며, 북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난다. 교육기관으로는 군자초등학교와 군자중학교·군자공업고등학교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경기도 기념물 제163호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조(仁祖)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1557~162...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의 옛 지명. 서해안에는 곶(串)이 많은데, 곶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육지를 말하며 규모가 더욱 크면 반도라 부른다. 육지가 침강하면 골짜기는 만이 되고, 산줄기는 반도나 곶이 된다. 사취(砂嘴)가 바다에 돌출하여 형성되기도 한다. 갑(岬) 또는 단(端)이라고도 하고, 흔히 관[串] 자를 빌려 ‘관’ 또는 ‘곶’으로 부르기도 한다. 반도의 말단 부분을 곶...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의 옛 지명. 구룡골은 본래 단성이씨 세거지였으나 조선시대 말에 이조판서를 지낸 김수근(金洙根)[1798~1854], 영의정을 지낸 김병학(金炳學)[1821~1879]과 김병국(金炳國)[1825~1905], 이조참판을 지낸 김정규(金貞圭)[1866~1895], 화가 김용진(金容鎭)[1878~1968] 등 안동김씨들의 세도에 밀려 안동김씨 세장지로 바뀌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던 옛 지명. 독수리는 안산읍성의 망해정(望海亭) 터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망해정 터는 안산군 관아 서쪽에 있었으며, 안산군 군내면 서정리(西亭里)[독수리] 지역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기와 조각 등이 수습되고 있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승지고적(勝地古跡)조의 “읍치서고유망해정구지관사후유토체형지차즉고연성군김정경지서식처야(邑治西皐有望海...
-
조선 전기 경기도 안산 지역에 초지량영이 설치되었던 곳.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사곶이에 초지량만호가 설치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수군만호가 주둔하던 초지량만호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사곶이로 옮긴 것이다. 문종 연간에는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영을 옮겼다. 사곶이에 영이 있을 때는 사곶영(沙串營)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영이 설치된 시기는 짧은 시간에 한...
-
조선시대 물고기 저장소가 있던 곳의 옛지명. 살막이란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할 조기를 어부살[살막재에서 서쪽으로 약 3~4㎞ 지점]에서 잡아 이곳 빙고(氷庫)에 저장했던 곳이란 뜻으로, 마을에서는 보통 ‘핑고구뎅이[氷庫구뎅이]’라 하였는데, 본래의 이름은 사옹원 분원(司饔院分院)이다. 사옹원 분원 건물은 1910년대에 헐려 없어지고[당시 군자면사무소를 짓는 데 사옹원 분원의 목재가...
-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속하였던 섬. 소홀도(召忽島)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한 자월도(紫月島)를 말한다. 자월도는 면적 7.06㎢, 해안선 길이 20.4㎞, 최고점 178m인 섬으로 약 170가구에 45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항에서 남서쪽으로 32㎞ 해상에 위치하며, 안산시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이다. 주변에 승봉도(...
-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의 별칭. 안산시가 별호(別號)인 연성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1463년(세조 9)부터였다. 조선 초기 강희맹(姜希孟)이 안산의 별서(別墅)에 중국에서 가지고 온 연꽃을 심은 뒤부터 연성(蓮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에 의하면, 좌찬성 강희맹이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가 되어 중국의 난징[南京]을 다녀오는 길에 중국에서도 자...
-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속하였던 산. 신경준이 1769년 편찬한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한남정맥(漢南正脈)은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끝나는 안성 칠장산(七長山)에서 시작되어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경기도 한강 본류와 남한강의 남쪽 유역을 분수령으로 해발 100m 미만의 낮은 등성이를 연결한 산줄기를 말한다. 한남정맥은 인천광역시와 시흥시, 안산시,...
-
조선시대 경기도 안산 지역에 속하였던 섬. 조선시대 안산 지역의 오질애와 무응고리는 봉수 체계 가운데 제5거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제5거의 경로는 전라도 순천 방답진에서 출발하여 경기도에 들어와 양성·수원·남양의 해운산을 거처 안산에 이르며, 이는 다시 부평을 지나 양천 개화산에서 한양 목멱산[남산]에 전달되었다. 오질애(烏叱哀) 또는 오질이도(吾叱耳島)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부터...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던 자연마을. 주더리는 구슬 ‘주(珠)’자와 다리 ‘교(橋)’자를 써 주교(珠橋)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과 옛날 바닷가에 뱃줄을 매는 닻줄을 놓고 다녔다고 하여 주더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기숙사 앞까지 배가 들어 왔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 삼리와...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있는 수암봉의 옛 이름. 봉우리의 생긴 모습이 독수리 머리 모양과 같다고 하여 독수리 ‘취(鷲)’자를 써 취암이라 하였다. 취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보이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산천조에는 “(안산의) 진산은 취암(鷲岩)이다. 군(郡) 동쪽에 있으니, 동쪽은 과천(果川), 북쪽은 금천(衿川), 남쪽은 광주(廣州)의 경계가 된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