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166 |
---|---|
한자 | 張東輝 |
영어음역 | Jang Donghwui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지훈 |
[정의]
경기도 안산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영화배우.
[개설]
장동휘는 1919년 6월 22일 인천에서 출생하여 2005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장동휘는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한 뒤, 광복 뒤에는 악극단 낙천지에서 활동하였다. 1957년 38세의 늦은 나이에 김소동(金蘇東) 감독의 「아리랑」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그 뒤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이만희(李晩熙)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유현목(兪賢穆) 감독의 「순교자」 등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말에는 「팔도사나이」[1968]를 비롯해 「돌아온 팔도사나이」, 「예비군 팔도사나이」 등 팔도 시리즈와 「명동출신」[1969], 「명동노신사」, 「명동백작」 등 명동 시리즈에 출연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 뒤에도 「돌아가는 삼각지」[1970], 「용서받지 못할 자」[1970], 「한강」[1975] 등에 출연하면서 박노식(朴魯植)·허장강(許長江)·전원윤(全元潤)[독고성]·황해(黃海) 등과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 액션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장동휘가 진짜 인천 출신 주먹이다.”라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리얼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고, 한국을 대표하는 액션배우로 군림하였다.
197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가 침체기에 접어든 이후 장동휘는 「한강」, 「어머니」[1977], 「경찰관」[1978], 「사랑의 뿌리」[1978] 등 작품성이 있는 영화들에 출연하였지만, 워낙 액션배우의 이미지가 큰 탓인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주로 전쟁영화와 범죄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았다. 건장한 체격에 매서운 눈, 화통한 목소리와 특유의 너털웃음, 선 굵은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다.
장동휘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영화배우협회장과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예술 분야 전문직능인단지로 준공된 안산 성포동 예술인 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장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제1회 청룡영화상 특별상, 1995년 옥관문화훈장,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 1971년 제10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