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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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森煥 |
영어음역 | Yi Samhwan |
이칭/별칭 | 자목(子木),목재(木齋),소미(少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목(子木), 호는 목재(木齋)·소미(少眉). 아버지는 이광휴(李廣休), 어머니는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정덕녕(鄭德寧)의 딸이다. 양부는 이병휴(李秉休), 양모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허달(許達)의 딸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종조(從祖)가 된다.
[활동사항]
이삼환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났다. 1740년(영조 16) 종조인 성호 이익에게서 학문을 수학하기 시작하였고, 1746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과에 응시하는 것은 포기한 채 이익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1763년 성호 이익이 사망한 뒤 양부 이병휴가 『성호유고(星湖遺稿)』 교정 작업을 주도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1786년(정조 10) 「양학변(洋學辯)」을 저술하여 성호학파 내에서 천주교 배척을 주도하였다. 1795년 충청도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서 정약용(丁若鏞) 등과 강학 모임을 갖고 『성호유고』의 정리와 함께 성호학파의 재기를 시도하였다.
1799년에는 홍역이 창궐하자 중국의 의서인 『마과휘편(痲科彙編)』을 연구하여 홍역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다. 1809년(순조 9) 덕산현감(德山縣監) 정래중(鄭來重)의 시폐 척결에 대한 상소문을 부탁받고 ‘환곡(還穀)의 폐단’, ‘양정(良丁)의 폐단’, ‘전부(田賦)의 폐단’ 등 이른바 3폐를 지적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로정신(養老精神)이 투철하여 자신이 창안한 향약(鄕約)의 규정에 따라 해마다 가을에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각각 백전(百錢) 씩의 돈을 내리어 맛있는 음식을 제공케 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중국 송대의 학자 이상(李常)의 「이씨산방(李氏山房)」을 모방하여 쓴 『소미산방장서(少眉山房藏書)』8책이 있었다고 하나 그 중 3책만 필사본으로 현존한다. 그 밖에 「소미산방급고경(少眉山房汲古經)」, 「금삼품(金三品)」, 「백가의(百家衣)」, 「장천리향약(長川里鄕約)」 등이 각각 1책 씩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작품은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일부 수록되었다. 또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작성한 「양학변(洋學辯)」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장천리에 있다가 뒤에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매산묘원(梅山墓園)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