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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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弘渡 |
영어음역 | Choe Hongdo |
이칭/별칭 | 경제(景濟),구포(鷗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계형 |
[정의]
조선 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경제(景濟), 호는 구포(鷗浦).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최자준(崔自濬), 아버지는 최황(崔滉), 어머니는 철원최씨(鐵原崔氏)로 최승진(崔承溍)의 딸, 처는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정유침(鄭惟沈)의 딸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누이이다. 자호 구포는 당시의 경기도 광주의 반월방(半月坊) 사리(四里)[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던 포구의 이름이다.
[활동사항]
최홍도는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수찬, 승문원교리,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9월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승문원저작으로 있을 당시 을사사화가 일어났는데 윤임(尹任) 일파인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성종의 3남]와 동서인 관계로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같은 해 문무를 겸비하였다 하여 함경도 북병영의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병마절도사 밑에서 문부(文簿)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북평사를 둔 것은 변방에 무신 수령이 많이 임명되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이 막중하여 문신 관료가 보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48년(명종 3)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의, 병조참의, 홍문관부제학, 세자시강원좌부빈객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564년(명종 19) 3월 궁중의 쌀과 곡식 및 장(醬) 등의 물건을 맡았던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에 올랐으며, 같은 해 10월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최홍도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고 임필형(任弼亨), 임열(任說), 민경열(閔景悅) 같은 신진 사류들과 도의로써 교제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민창혁(閔昌赫)이 묘표를 찬하였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