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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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在學 |
영어음역 | Yi Jaehak |
이칭/별칭 | 성중(聖中),지포(芝浦),익헌공(翼獻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중(聖中), 호는 지포(芝浦). 증조부는 한성부판관을 지낸 이의규(李宜揆), 할아버지는 호조좌랑 이보순(李普淳),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숭호(李崇祜)이다.
[활동사항]
이재학은 1770년(영조 46) 문과에 급제한 뒤 정자, 수찬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1776년 시독관(侍讀官)으로 있으면서 신분 질서의 문란함을 지적하며 명분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듬해에는 곡식으로써 관직을 사고파는 것이나 공이 있더라도 상 대신 관직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1777년(정조 1)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80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지적하고 언로(言路)를 활짝 열 것을 건의하였다.
1783년 함경도감진어사(咸鏡道監賑御史)로 부임해서는 북방 지역의 재황에 대비하여 교제곡(交濟穀) 12만 석 중 3분의 2를 보관하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도록 법규를 만들었다. 함경도 지역의 진휼 정사를 완결하고 돌아온 후 특별히 가자(加資)되었고, 전라도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793년에는 동지사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경기관찰사,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척신 김구주(金龜柱)의 역모를 탄핵하여 나주로 유배시키기도 하였는데,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김구주 일당인 채지영(蔡趾永)의 탄핵을 받았다. 또한 정조가 죽은 후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을 맡았다가 정자각(丁字閣)에 탈이 생기자 파직되고 가산(嘉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온성(穩城)으로 옮겨졌다가 1805년(순조 5) 풀려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이재학은 전강(殿講)에서 1등을 차지하여 상을 받을 정도로 한학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술 및 작품]
함경도감진어사로 재임 중 임무 수행 과정을 기술한 『북로기사(北路紀事)』를 편찬하였으며 시집으로 『한사(閒事)』를 남겼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원시동 옻나무골에 있다가 1978년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용인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820년(순조 20) 익헌(翼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