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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641
한자 李繼孫
영어음역 Lee Gyeson
이칭/별칭 인지(引之),귀헌(龜軒),귀봉(龜峰),경헌(敬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화성시
성별
생년 1423년연표보기
몰년 1484년연표보기
본관 여주
대표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지(引之), 호는 귀헌(龜軒)·귀봉(龜峰). 아버지는 광흥창승을 지낸 이의인(李依仁)이고, 어머니는 송구윤(宋九贇)의 딸이다. 아내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계손(李繼孫)[1423~1484]은 장인인 정보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생원이 되었고 그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사간원정언, 이듬해에는 철산군수·철원부사가 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예조정랑·사헌부장령·함길도경차관·승정원동부승지·강원도관찰사·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 1)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난 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유학 교육을 진흥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함경도는 북방에 위치할 뿐 아니라 여진족과 가까이 있어서 기질이 거칠었고 무예에는 능하지만 학문을 숭상하지 않아 미풍양속이 크게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영흥을 유수부로 승격시켜 관찰사가 겸직하게 하고, 학덕과 덕망이 높은 문신을 교수로 채용하는 등 지역의 학문을 진작하는 업적을 쌓았다. 1471년(성종 2) 이조참판과 병조참판을 거쳐 1474년 형조판서로 재직하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뒤 성균관대사성·황해도관찰사·사헌부대사헌·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경기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혼인 및 손님 접대에 필요한 어육을 황해도관찰사 이봉(李封)에게 요구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된 뒤 아산에 유배되었다. 1481년(성종 12) 풀려나 한성부윤과 병조판서를 거쳐 1483년 정조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상인들을 수행하여 상거래를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나, 그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여 처벌을 면하였다. 명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은 반면, 재물을 탐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묘소]

묘소는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었는데,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1979년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 산63번지로 이장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고, 묘비의 비문은 임사홍(任士洪)이 지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증되었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 영흥의 흥현서원(興賢書院), 안변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한편 1995년 화성문화원에서 이계손의 사당이 있는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사적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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