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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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趾仁 |
영어음역 | Yun ji-in |
이칭/별칭 | 유린(幼麟),양강(楊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현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유린(幼麟), 호는 양강(楊江).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좌랑을 지낸 윤엄(尹儼)이고, 할아버지는 공조참의를 역임한 윤민헌(尹民獻)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윤강(尹絳)이며, 어머니는 유익(柳杙)의 딸이다. 부인은 판중추부사 이정영(李正英)의 딸이고, 동생은 정승을 지낸 윤지선(尹趾善)과 윤지완(尹趾完)이다.
[활동사항]
윤지인(尹趾仁)[1656~1718]은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3년 송시열(宋時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려 하자 유생 신분으로 만류할 것을 숙종에게 청하였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696년 세자시강원설서와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그해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부수찬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하였다. 1697년 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이조정랑을 지냈다.
다시 홍문관교리가 된 뒤 후궁의 수가 많고 은전이 과도하며 궁중의 사치가 심하다고 간쟁하였다. 1701년(숙종 27) 시독관[경연청에서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를 맡아 하던 정5품 문관 벼슬]으로서 단천의 폐광된 은광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논해 시정하였고, 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의정부사인 등을 거쳐 특명으로 당상관인 승정원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서원의 지나친 설립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였다. 그해 9월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사약을 받을 때 숙종에게 명을 거둬들이도록 간쟁하였고, 세자의 보호와 희빈장씨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
1703년(숙종 29) 다시 서용되었고, 1706년 이후 홍문관부제학·승지·사간원대사간·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1708년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710년 홍문관부제학·예조참판·평안도순무사·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냈다. 1712년(숙종 38) 승정원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동지사겸사은사의 부사로 중국 베이징[北京]을 다녀왔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특명으로 한성부판윤으로 승진하였고, 1715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궐문에 괘서가 붙었는데, 윤지인과 최석항(崔錫恒) 등 9인이 모반했다고 무고되었으나 왕이 불문에 부쳤다. 이듬해 제도민호군역구관당상(諸道民戶軍役句管堂上)에 임명되어 전국의 군역 변통을 담당하였다. 그해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안산에 다녀온 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송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윤용(尹容)과 함께 부자가 청백리로 소문이 자자하여 1790년(정조 14) 청백리에 천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