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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635
한자 尹趾善
영어음역 Yun Jiseon
이칭/별칭 중린(仲麟),두포(杜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성별
생년 1627년연표보기
몰년 1704년연표보기
본관 파평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린(仲麟), 호는 두포(杜浦). 증조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윤민헌(尹民獻), 아버지는 이조판서 윤강(尹絳), 어머니는 지돈녕부사 정광성(鄭廣成)의 딸이다. 아우는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다.

[활동사항]

윤지선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서 성장하였다. 1660년(현종 1) 통덕랑으로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674년에 사헌부헌납, 이조좌랑을 지내고, 같은 해 숙종이 즉위한 뒤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어 홍문관부수찬,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1681년(숙종 7)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공충도는 충청도]와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83년 승정원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형조참판, 대사헌에 이어 이조참판, 광주유수(廣州留守),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회양도호부사와 성천도호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병조판서로 지의금부사가 되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그 후 이조판서를 지내고 1696년 공조판서, 좌참찬,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러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지선은 성품이 온건하고 원만하여 당쟁의 와중에 휩쓸리지 않았고 숙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복제설(服制說) 시비로 송시열(宋時烈)이 덕원으로 귀양갈 때도 모나지 않으면서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상소를 올려 경직된 정국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숙종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려 할 때 “왕자가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인데, 앞으로 정궁(正宮)에서 아들이 없으면 세자가 저절로 정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했던 숙종의 주장을 완곡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송림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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