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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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에서 강이나 바다, 호수의 일부를 둑으로 막아 육지로 만드는 사업.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특히 서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이 발달하여 간척에 유리하다. 고대의 간척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벽골제(碧骨堤)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황등제(黃登堤) 등에서 삼국 시대 간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고려 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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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영암 지역의 역사. 개항기는 일반적으로 1876년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이후 1910년 식민 통치 체제로 전환되는 시기까지를 통칭한다. 사회적으로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수용을 통해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체제로 변화되어 가는 상황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 각 나라와도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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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 마을에 있었던 포구. 망호리 배널리 포구는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며, 원해창 또는 구해창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12대 조창, 즉 장흥창이 설치된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는 부춘정 동쪽 건너편으로 비정되며, 속칭 ‘뱃마테’ 또는 ‘배나테’라고도 하였다. 바다였을 당시에 갯고랑이 망호리 배널리 포구와 부춘정 앞을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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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에 있는 정기 시장. 시종장은 내동리에 있어 내동장이라고도 하며,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26-23번지 일원에 있다. 일제 강점기 후기에 신북장과 함께 등장한 재래시장이다. 시종장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장과 약 6㎞ 거리에 있다. 시종장은 시종 군내 버스 정류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신작로 주변에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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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교량. 영암교(靈巖橋)는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다리로 영암 초등학교 앞에 있어 일명 학교 다리라고 부른다. 영암교는 월출산에서 발원하여 북쪽 영암천으로 흐르는 망호천을 건너는 다리로, 영암읍내에서 영암 문화원을 거쳐 영암 초등학교로 갈 때 건너야 하는 다리이다. 실내 체육관 앞으로 우회 도로인 영암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영암읍에서 시종, 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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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영암에서 수도까지 세곡을 배로 운반하던 국가 제도. 고려 시대 영암에는 12대 조창으로 장흥창(長興倉)이 설치되었다. 영암군의 관할 아래 있는 영암, 해남, 강진 일대의 세곡을 모아 조운선에 실어 개경에 납입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영암군은 나주 영산창에 세곡을 납부하였다가, 1512년(중종 7)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포창으로 이관되자 법성포창으로 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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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학리와 영암군 서호면 금강리를 왕래할 때 이용했던 나루이자 포구. 창진포는 시종면 신학리 창진 마을과 서호면 금강리 지네 머리를 왕래할 때 이용하였던 나루이자, 어선이 정박하거나 목포를 왕래하는 객선이 기착하던 포구였다. 현재 영암천의 하류가 영산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2012년 완공된 신금 대교가 창진 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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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세곡 창고. 영암군 군서 해창은 별칭 원해창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영암군 일대에서 생산된 대동미 등 세곡을 해창에 모았다가 배에 싣고 한양으로 출발한 곳이다. 그런데 이전의 해창은 영암읍 망호리 배널리[부춘동] 마을에 있었으나 19세기 무렵 망호리의 뱃길이 토사의 퇴적으로 어려워지자 군서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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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 때부터 영암의 해로 입구로 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해창(海倉)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 영암군조를 보면 영암에는 총 네 곳에 해창이 있었으며, 지금의 해창 마을은 군에서 15리에 위치한 곳으로, 목포로 가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영암군 서시면(西始面)의 지역이었으며, 조세 창고가 있는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