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78
한자 靈巖長川里先史住居址
이칭/별칭 영암 장천리 선사 집자리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378-1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영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1986년 -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고인돌 주거지 발굴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9월 29일연표보기 -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 전라남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 전라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378-1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목포 대학교 박물관 -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61
성격 주거지
크기(높이,길이,둘레) 520㎝[8호 주거지 지름]|470㎝[8호 주거지 폭]|27㎝[8호 주거지 깊이]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집자리.

[발굴 경위]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靈巖長川里先史住居址)는 1984년 고인돌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제보로 확인되어,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주거지 11기와 고상(高床) 주거지[땅 위로 세운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다.

[위치]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378-1번지에 위치하며, 서호면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괴음 마을 앞 도로변에 있다. 2013년 현재 선사 유적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형태]

대부분 파괴된 상태로 조사되어 평면 형태와 크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평면 형태는 원형 2기와 타원형 4기 등 6기뿐이고, 크기는 대부분 지름 430~510㎝, 깊이 15~32㎝ 정도로 면적은 11.8~20.3㎡이다. 1호 주거지는 평면이 원형으로 지름 380㎝, 폭 350㎝이고, 바닥은 진흙 다짐을 하였으며 바닥 면에 기둥의 목탄(木炭)이 길게 놓여 있어 불탄 주거지이다. 타원형 구덩이[竪穴]와 기둥 구멍[柱穴]이 확인되지 않았다.

가장 큰 8호 주거지는 평면 타원형으로 지름 520㎝, 폭 470㎝, 깊이 27㎝이다. 바닥 중앙부에는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쪽 내부에 기둥 구멍이 있는 이른바 송국리식(松菊里式) 주거지이다. 바닥 처리는 진흙을 2~3㎝ 정도 깔았으며 일부는 바닥면을 다져서 사용하였으나, 출입 시설이나 화덕 자리[爐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상 주거지는 기둥 자리가 남북 방향으로 2열을 이루고 있다. 고상 가옥은 당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추정된다.

유물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송국리식 토기(松菊里式土器)와 깊은 바리 모양 토기[深鉢形土器], 소형 긴목 항아리[長頸壺] 등 토기류, 홈자귀[有溝石斧], 삼각형 돌칼[三角形石刀], 간돌 화살촉[磨製石鏃],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 돌끌[石鑿], 구멍 뚫린 턱자귀[有段石斧], 숫돌[砥石], 갈돌과 갈판 등 석기류가 있다.

[현황]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는 1986년 9월 2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이곳은 발굴된 자리에 주거지 1동을 복원하여 전시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주변에 수혈 주거지와 고상 가옥을 복원해 놓아 선사 유적 공원화하였다. 또한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는 ‘영암 장천리 선사 집 자리’로도 불린다.

[의의와 평가]

영암장천리선사주거지는 전라남도에서 두 번째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주거지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한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주거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중앙부에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단에 중심 기둥 구멍이 있는 형태이며, 출입 시설과 화덕 자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주거지는 호서 지역과 유사한 형태로 서해안 지역을 통한 동일한 주거 문화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혈 주거지와 고상 가옥이 함께 발견되어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과도 관련되어 그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고*** 고인돌은 분묘 또는 제례 관련 유구로 알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발견했으면 정의를 청동기 시대 집자리. 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 집자리·분묘 유적이라고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과 관련하여 해당 항목의 문맥상 오류가 없으므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8.04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