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5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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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
집필자 | 심재석 |
출생 : 태몽은 없었다
유태병 노인회장은 1936년생이고 고향은 납읍리이다. 출생 당시 부모님께서 꾼 별다른 태몽은 없었고, 본인 또한 특별하게 출생과 관련된 기억은 없다. 유태병의 어머니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납읍리 안에 계시던 작명하는 분이 지었다. 그는 어린 시절 별다른 일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다만 그의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약을 먹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4살 때 돌아가셨고, 이후로도 생활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성장기 - 어린 시절 물이 아까워서 세수도 못하던 시절
유태병의 어린 시절, 제주 중산간 지역에는 물이 귀해서 세수도 제대로 못했다. 칫솔도 없어서 양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봉천수 저수지가 나중에는 개발이 되어 세수야 했지만 요즘처럼 비누칠 하면서 깨끗하게 세수할 수 없을 정도로 물이 귀해서 아껴 써야만 했다. 마을에서 나중에 봉천수를 모으기 위해 못을 만들었고, 마을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은 그곳에서 확보하였다. 물이 귀했던 만큼 그곳에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근접하지 못하게 했었다.
한 지관이 납읍에 와서는 “여기 땅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땅을 파보니 과연 지관의 말대로 물이 나왔다. 그래서 그곳에 못을 만들었는데, 그 못이 바로 사장못이다. 당시에는 장비가 모자라고 모든 일은 인력으로만 하다 보니 못을 욕심대로 크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당시 마을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식수는 사장못에서 조달을 했다.
사장못에서 집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데에는 물허벅을 사용했다. 물허벅을 지는 일은 여자들이 맡았다. 집안의 물통에 길어온 물을 보관하고, 그 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 생활용수를 감당하기 위해서 여인네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물허벅을 지고 날라야 했다.
성장기 - 고무신이 너무 신고 싶었던 초등학교 시절
유태병은 1940년대 초 해방이 되기 전 애월국민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약 3㎞ 정도인데 그 길을 매일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만 해도 그보다 더 먼 거리를 걸어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으며, 3㎞ 정도면 걸어 다니기에 가까운 거리로 간주되었다.
당시 납읍에서 애월국민학교까지 다니는 학생들은 3개 반이 있었다. 매일 아침 반장이 군대식으로 몇 시까지 큰길로 나오라고 하면 학생들이 다 모여서 애월국민학교까지 함께 걸어 다녔다.
당시 애월국민학교에는 학생들보다 일본 군인들이 더 많았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일본군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에 막사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에 인구가 20만 정도였는데 일본 군인이 20만 정도 있었다고 들었다. 어딜 가도 일본 군인이었고, 교실도 군인들에게 빼앗겨서 공부는 나무 아래에서 해야 했다. 그리고 집에서 호미 같은 농기구를 가지고 등교를 하라고 했고,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보다 단체로 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교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납읍 향사에서 부족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당시 산수나 공민이라는 과목을 공부했는데, 공민은 요즘으로 말하면 도덕에 해당하는 과목이다. 교과서는 학교에서 나왔지만 공책은 사서 썼다.
유태병은 신발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신발도 제대로 없었고, 학교까지 맨발로 걸어 다녔기 때문에 고무신이 그렇게 신고 싶었다고 한다. 잘사는 부잣집 자식들은 심지어 운동화도 신고 다녔는데, 유태병은 그것을 특별히 부러워했다.
어머니가 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모두 병으로 죽고 유태병 혼자 살아남았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전쟁중이라서 제대로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제대로 공부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성장기 - 청년 시절 살기 위해 육지로 나가던 마을 처녀들
제주도가 섬이어서 교통이 불편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처럼 환금작물로 수입이 좋은 밀감도 없었다. 농작물은 보리, 조와 같은 밭작물이 고작이어서 그야말로 일반적인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마을 여자들은 17세나 18세가 되면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나갔다. 부산과 대구에 공장이 많아서 제주 처녀들이 그쪽에서 일자리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 취직을 해서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유태병의 아내도 부산에 있는 방직공장을 다니다가 결혼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복무 중에 올린 혼례 - 말 타고 가마타고.
유태병은 만 20세였던 1956년에 군에 입대를 했다. 혼인은 22살에 했는데, 유태병은 당시에 군복무중이었다. 결혼 상대는 같은 마을에서 살던 처녀와 했다. 같은 나이 또래여서 김매기 같은 일도 같이 하고, 그렇게 알고 지냈다. 그러나 서로 연애를 한 것은 아니고 혼담을 건네 소개를 받았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님도 군대 가셔서 혼담을 건넬 사람이 없었다. 이모부가 유태병에게 ‘너 누구에게 이야기 해볼까 하는데 어떠냐’그래서 유태병은 좋다고 했다.
당시 혼례는 대부분 구식으로 치렀다. 남자는 사모관대를 쓰고 말을 타고 장가를 가던 시절이었다. 유태병도 구식 혼례를 치렀는데, 남자는 관복을 입고 여자는 쪽두리를 쓰고 혼례를 치렀다.
혼례식을 하기 전에 양가 친척 어른들을 모시고 상견례를 했고,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예를 보이고 예단을 갖다 드렸으며, 거기서 사돈끼리 인사하고 음식도 먹고 나서, 가마에 신부를 태우고 신랑집으로 데려왔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갈 때는 하인이 따라가서 신랑이 탄 말도 끌었고, 신랑 집으로 돌아올 때는 신부가 탄 가마를 들기도 했다. 신부가 신랑집에 도착하면 신랑집에서도 혼례를 하기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고 양가 부모님과 친인척들이 상견례를 했다. 그 다음날은 신랑과 신부가 다시 처가로 가서 하루를 묵고 또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공장에 다니던 아내는 결혼 후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고, 유태병 또한 군대 제대 후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 유태병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은 아내와 3남2녀가 있다. 아내는 지금 중풍에 걸려서 고생을 하고 있다.
납읍의 혼인권 - 이웃 마을은 다 사돈, 친척들이지
유태병의 어머니는 100세에 돌아가셨다. 외가도 납읍이다. 유태병의 외할아버지는 하귀에 사셨다고 한다. 상가와 납읍은 인연이 많은 곳이다. 애월이나 곽지보다는 봉성, 어음, 상가와 납읍 출신끼리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마을 사람들은 서로 환경이 비슷하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로 알고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한림읍 명월리와 납읍 사람들 사이의 혼인도 자주 있었다. 결과적으로 주변 마을들이 대부분 혼인으로 연결되어 모두 서로 잘 알고 지냈다.
자녀들 키운 이야기
유태병의 자녀들은 4, 5, 6월에 태어났는데 농사일이 바빠서 그냥 애기구덕에서 키웠다. 부모들이 입던 갈옷을 애기구덕에 이불삼아 깔고, 아이들을 눕혀 놓은 다음 밭 근처에 있는 나무그늘 아래 두었다. 그저 눈뜨면 밭일을 하고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아이들에게 백일이나 돌잔치 같은 것을 해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 밭에 나가서 일을 했고, 일하는 동안 애기구덕에 해가림을 해 두면 아이들은 구덕에서 스스로 자랐다. 아이들은 납읍초등학교와 애월중학교에 다녔으며, 고등학교는 제주시에서 다녔다.
자녀들의 혼인
예전에는 제주도에서 혼인은 근처 마을이나 마을 안에서 많이 했다. 하지만 자식들이 마을에서 살지 않고 제주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연애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태병의 경우 납읍 출신 며느리나 사위는 없다. 예전처럼 구식 혼례를 하지 않고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하고 피로연은 일부는 식당에서, 일부는 집에서 하기도 했다.
결혼식은 제주시에서 주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막내는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다. 예전보다 혼례 절차는 간단해졌다. 보통 결혼 절차는 둘이 연애해서 만나니까 결혼식 전에 사돈과 상견례를 하고, 며느리가 인사하러 오면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위는 처가에 가서 인사드리는 정도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 약혼식을 하기도 한다.
제주에서는 신랑이 택일은 하고, 날을 받으면 간단한 음식(돼지고기, 쌀, 술 등)을 가지고 신부집에 간다. 그러면 신랑은 신부집에서 대접받고 돌아온다.
어머니에 대한 애도
유태병의 어머니는 백수를 하시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으시고 10월 밀감 수확기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단 것을 좋아하셔서 식혜, 사탕을 두고 다녔다. 그날도 간식과 식혜를 드렸는데, 조금 있다가 그릇을 챙기려는데 돌아가셨다. 유태병는 자식으로 도리를 제대로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태병는 지관을 모시고 가서 묘터를 보았다. 묘지는 산 위에 터를 사서 목장 위에 모셨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렀다. 제주도에서는 5일장을 많이 한다. 여러 가지 준비하다 보면 3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염과 습은 장의사를 불러서 했다. 애월에 있는 장의사를 불러서 큰일을 마무리 했다.
그 뒤 큰형님 돌아가시고 나서 형님하고 조카들이 상의해서 같이 돈을 모아 가족 묘지를 만들었다. 가족도 많고 묘 자리 할 땅도 모자라고, 먹고사는 것도 바빠서 벌초도 자주 못하는 형편이라 유태병도 가족 묘지에 동의했다. 면적은 200평 정도이다. 앞으로는 모두 가족묘에 묻힐 것이다. 유태병 본인도 죽으면 가족묘에 장사를 지내라고 했다.
유태병 집안에서는 제사도 장남, 차남 할 것 없이 형제들이 나누어서 한다. 장자는 제일 윗할아버지인 증조부 제사를 맡고, 둘째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맡는 식으로 분배를 한다. 명절 차례는 설과 추석, 두 번인데 형제가 있으면 큰아들이 설을 모시면 작은 아들이 추석 명절 차례를 지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재산을 분배할 때 장자만 다 주면 불만이 생기니, 재산도 골고루 나누고, 그래서 제사도 골고루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서 그렇게 한다. 제주도에서 재산 분할은 주로 돌아가기 전에 유언을 따른다. 주된 유산이야 토지나 동산 정도이지만. 제사 모실 때마다 형님, 동생 집으로 다닌다.
제사 음식은 주로 메, 갱, 돼지고기, 소고기 산적, 두부는 꼭 올린다. 과일은 오색 과일을 올리고, 채소는 고사리, 콩나물, 무채, 부침, 시루떡, 송편 등을 올린다. 육지는 대추나 밤이 들어가는데 제주도는 조금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대추나 밤을 잘 안 올린다. 오색 과일은 귤, 사과, 배, 감, 그리고 수박이나 참외 같은 것을 올린다. 그것은 집안마다 다르다. 차례상은 제사상과 비슷하다. 추석 때는 밤을 올리기도 한다. 설날은 떡국을 하는 집도 있는데 여기선 설날에도 메하고 갱을 올린다. 제사는 3헌관으로 하고, 가족 숫자가 되면 집사 2명과 삼헌관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