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T03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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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仁津里-口碑傳承-傳說-民譚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
집필자 | 김기설 |
[전설과 민담]
안인진리 서낭당에는 오래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처녀가 바닷가에서 미역을 따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한 수려한 청년이 배를 저어 그 앞을 지나갔고 처녀는 청년에게 한눈에 반했다. 상사병에 걸린 처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는데, 이상하게도 처녀가 죽은 다음부터 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어부의 꿈에 죽은 처녀가 나타나서 “고기가 잡히지 않아 큰 걱정일 테니 고기를 잡고 싶거든 남자의 성기를 달아라.” 하고 사라졌다. 이야기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처녀가 알려준 대로 나무로 남자 성기를 깎아 바친 뒤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제야 다시 고기가 그물에 가득하게 잡혔고, 이후 사람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마다 계속 남자 성기를 만들어 바쳤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서낭제 때면 서낭당에 남근(男根)을 깎아 바치는 풍습이 이어져왔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안인진리 해령사에도 전한다. 옛날 강릉부사가 기생들을 데리고 절경으로 이름난 해령산에 놀러 왔다. 그 중 한 기생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있는 그네를 타다 그만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고, 부사는 동네사람들에게 “죽은 기생이 불쌍하니 제사를 지내주어라.” 하고 마을을 떠났다. 동네사람들은 제단을 쌓고 위패를 만들어 ‘해랑지신위(海娘之神位)’라 써 놓았고, 봄·가을로 일 년에 두 번씩 제사를 올렸다. 그것을 보고 나이 많은 분들이 “여신만 모시니 신이라 하여도 불쌍하다. 짝을 지어주자”고 하여 나무로 남자의 성기를 만들어 새끼에 매달아 걸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매년 남근을 매달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1930년경, 안인진리 구장을 하던 김천오라는 사람의 부인이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정만 되면 해령단에 오르내리며 ‘김씨를 배우자로 얻었다’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이 여자에게 필시 해랑신이 쓰인 것이니 시험해 보자고 했다. 그래서 위패를 ‘김대부지신위(金大夫之神位)’이라 써 놓고 제삿날을 받아 놓으니 구장 부인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남근을 매달고 제사를 지내는 전통은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사람들이 자주 떼어 가는 바람에 지금은 매달지 않고 그냥 제사를 지낸다.
안인 해랑당의 전설도 이와 유사하다. 옛날 안인진 바닷가에 가난한 어부의 딸이 살고 있었다. 처녀는 가난에 쪼들려 살면서도 배필만은 훌륭한 사람으로 구하고자 했다. 마을 총각들은 마음에 차지 않았고, 세월만 지나 혼기를 놓치게 됐다. 할 수 없이 자신을 좋아하던 마을의 총각 어부와 약혼을 했는데 약혼한 다음날 총각 어부가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풍을 만나 죽고 말았다. 처녀는 총각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고 늘 봉화산에 올라가 바다를 보며 기다렸고, 결국은 지쳐 죽었다. 그런데 처녀가 죽고 나서 마을 앞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질 않았고, 해상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원혼이 고기를 몰고 간 것으로 믿고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사당을 지어 처녀를 신주로 모셨다. 이렇게 ‘해랑지신위’를 모셔 제사를 지내고 나니 다시 고기떼들이 몰려오고 사고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해랑사에서는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나무로 남자의 성기를 깎아 매달아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인진리 지역에는 이런 전설들뿐 아니라 재미난 민담들도 많이 전해 내려온다. 그 중 「삼정승 육판서가 난 ‘천리행룡(千里行龍)의 만리안대(萬里案臺)’의 명당」 이야기가 유명하다.
화비령 북쪽, 안인진리 송천마을에는 ‘천리행룡(千里行龍, 산맥이 높았다 낮았다 하여 기운차게 멀리 뻗는다는 곳으로 풍수지리상의 명당)에 만리안대(萬里案臺)’의 명당이 있다. 강릉김씨 옥가파의 중시조 묘가 있는 이곳은 옛날 함경도에 사는 지관이 처음 발견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모실 묏자리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지관이 기가 막힌 명당을 발견한 것이다. 지관은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아내를 남겨둔 채 함경도에 가매장해 둔 아버지 시신을 모시러 떠났다. 얼마 후 상중에 있던 강릉김씨 옥가파 중시조가 마침 이곳을 지나다 비바람을 만났다. 비를 피하려고 주위를 돌아보니 산 밑에 작은 움막 하나가 보이기에 달려갔더니 움막집에는 함경도 지관의 젊은 부인이 혼자 남아 있었다. 움막집이라 추녀가 없었기 때문에 젊은 부인에게 허락을 얻고 부엌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어 부엌까지 물이 찼고 상주는 어쩔 수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됐다. 그러다 그만 두 남녀는 한 방에서 밤을 지새우게 됐다. 비록 상중이긴 했지만 한 방에서 여자와 같이 있다 보니 둘은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상주는 여자가 왜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사는지 연유를 물었다. 여자는 “남편이 지관인데, 같이 이곳에 왔다가 여기에다 명당자리를 봐두고 시아버지 시신을 모시러 함경도로 갔습니다.” 라고 사실대로 말했고, 마침 묏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상주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어디가 명당자리요?” 하는 상주의 물음에 이미 정을 나눈 사이라 거리낌이 없었던지, 여자는 움막 뒤에 있는 명당자리를 자세히 알려줬다.
이튿날 비가 그친 다음 상주는 움막 뒤 명당자리에 가 보고 나서, 당장 아버님 시신을 그 곳에 갖다 모셨다. 그러고선 매일 그곳 상막으로 갔다. 상중인 사람이 매일 상막에 가니 동네 사람들은 효자가 났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실은 그 움막에 가서 그 여인과 정을 나눴던 것이었다.
한편 함경도에 갔던 지관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와보니 이미 그곳에는 묘가 들어선 것이 아닌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어이없어 주저앉은 지관은 탄식을 했다. 부인을 향해 “넌 내 아내가 아니니 다른 데로 가라.” 하고, 상주를 향해서는 “역시 묻힐 사람은 달리 있는 모양이오. 조상을 여기에 묻었으니 당신 후손은 삼정승 육판서가 날 것이오. 그런데 저 건너에서(명선문 쪽) 불이 비치면 당신 집안은 망할 것이오.”라고 말한 뒤 지관은 함경도로 돌아갔고, 상주는 여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후 강릉김씨 옥가파에서는 과연 지관의 말처럼 정승이 많이 났다고 전한다. 현재 옥천동에 남아 있는 옛 기와집들이 다 이때 정승을 지냈던 사람들의 집이라고 한다. 한참 번창하던 그 집안은 훗날 망하게 됐는데 그 시점이 강릉에 소금이 귀해서 안인 앞들에서 소금을 구우면서부터라고 한다. 지관이 경고한 자리에 불이 비치면서 예언처럼 그 집안의 운이 다해갔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불빛이 계속 비치고 있다. 염전 자리에 영동화력발전소가 들어고 있기 때문이다.
‘방재를 혼자 넘은 여자’라는 민담도 이 지역에서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방재(옥계면 낙풍리와 강동면 산성우리 사이에 있는 재)는 길이 험하고,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에 사람들이 이곳을 넘지 못했는데, 안인에 사는 부인이 대담하게도 혼자 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는데 마침 신랑이 집을 비우고 없었기 때문에 혼자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인이 막 방재를 지나려고 하는 순간, 소문처럼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여자는 빨리 아버지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두려움도 잊고 꾀를 냈다. 머리를 풀고, 옷을 모두 벗고 엉덩이를 내민 채 거꾸로 엉금엉금 기어간 것이다. 호랑이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신기해서 입을 여자 엉덩이에다 갖다 댔다. 그 순간 여자가 방귀를 뀌었다. 호랑이가 그 소리를 듣더니 “아, 이상하다. 원래 입은 옆으로 찢어졌는데 이놈의 입은 지레기(세로)로 찢어졌네. 그러니 피래기인 모양이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물러갔다. 여자는 얼른 옷을 다시 입고, 머리를 매만지고는 친정으로 가서 장사를 잘 치렀다고 한다.
호랑이와 관련된 민담은 이 지역의 화비령에서도 전한다.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이 영동 지역을 순찰하기 위해 강릉에 왔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밤에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자 장군은 부적을 벽에 붙였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울음을 그쳤다. 지금도 강릉은 다른 지역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작다.
그런 다음, 장군은 남쪽 지역을 순찰하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따르는 사람들이 화비령에 호랑이들이 득실거려 위험하다고 만류하였다. 장군은 “관리가 호랑이 때문에 정사를 포기하면 되느냐?” 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장군이 화비령에 이르니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장군은 부적을 여러 장 써서 뿌렸다. 부적은 바람을 타고 이 골 저 골 돌아다녔고, 부적을 본 호랑이들이 이곳은 자신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알고 모두 백두산으로 달려갔다. 그 후부터 화비령에는 호랑이가 없어져 사람들이 무사히 넘나들었다고 전한다.
화비령을 무사히 넘은 장군은 화비령 남쪽에 있는 방재를 넘게 되었는데 방재 꼭대기에는 승려로 둔갑한 호랑이가 나그네를 해치곤 하였다. 승려는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와 꼰(고누)을 두다가 자신이 이기면 나그네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이 지면 돈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불안하여 방재를 넘지 못했다. 장군이 방재에 올라서니 마침 승려가 혼자서 꼰을 두고 있었다. 장군을 본 승려는 역시나 꼰을 두자고 제의했다.
“우리 꼰이나 한 판 둡시다.”
“그래, 좋소,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기 합시다.”
“내기 좋지요.”하며 장군이 응했고, 승려와 꼰을 두게 되었다. 둔갑한 승려는 꼰을 두며 묘책을 부리려 했지만 장군은 술수를 알아차리고 대비하여 오히려 이겼다. 장군이 그 자리에서 승려를 찌르자 큰 호랑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이후로 재에는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가 없어져 나그네들이 무사히 넘나들 수 있었다.
장군은 방방재에서 호랑이를 물리치고 옥계를 지나 망상[동해시 망상동 들축나무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잠시 쉬기 위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는데, 주위에 있던 개미들이 자꾸 달려들어 허벅지를 물어 앉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군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주위에 원을 그었다. 그러니 웬일인지 원 안으로 들어온 개미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물지도 않았다. 지금도 망상의 개미들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그런 다음 장군은 북평[동해시 북평동]으로 갔다. 해가 저물어 1박을 하게 되었는데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적을 써 붙이니 모기들이 물지 않아 잠을 편히 잤다. 지금도 북평의 모기는 다른 지역의 모기와는 달리 잘 물지 않는다.
등명낙가사와 동해 용왕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임금이 눈병이 생겨 크게 고생을 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불편한데다 병의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점쟁이는 동해 용왕의 눈앞이 흐려 그러니 왜 흐리게 됐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답했다. 임금은 곧바로 신하들을 동해 바다에 보내 이유를 알아오게 했다. 백방으로 다니던 신하들은 괘방산 앞 정동에 와서야 그 연유를 알았다. 괘방산 아래 등명낙가사에 승려와 신도가 늘 북적여 밥을 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쌀뜨물이 바다로 흘러가 동해 바다를 흐리게 했던 것이다. 신하들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은 당장 그 절을 없애게 했다. 절이 없어지니 승려들은 다 떠나고 신도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자연히 쌀 씻을 일도 없어져 동해 바다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의 눈병이 나았다고 한다.
안인진리 인근의 대표적인 산인 괘방산은 그 괘방산 덕분에 과거 급제한다는 말이 내려온다. 괘방산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단(방)을 써 붙인 형상을 띄고 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강릉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면 임금으로부터 합격증서인 홍패, 백패를 받는다. 그러면 그 집의 하인이나 방꾼들이 이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두루마기에 방을 써서 실제로 괘방산에다 붙이기도 했다 한다.
『택리지(擇里志)』 「강원도 편」에 보면 ‘지방민들은 자주 놀러 다니기를 좋아해서 동네 노인들은 기꺼이 기악과 술과 고기를 가지고 산이나 물가에 가서 마음껏 논다. 이것으로 큰일을 삼기 때문에 자제들은 이에 감화되어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다. 더욱이 그곳이 두 서울에서 멀어 옛날부터 현달한 자가 적으나 오직 강릉에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많이 나왔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숨은 사연도 있는데, 세조 때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후 피부병이 생겨 오대산에 와서 피부병을 고치고 그 고마움에 강릉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
괘방산 동쪽 줄기에는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지은 등명낙가사가 있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이 절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 동이 틀 무렵, 등을 들고 괘방산 봉우리에 올라와 바다를 보며 기도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과거 급제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러니 괘방산은 과거 급제의 꿈을 가지고 공부하던 서생들에게는 보배 같은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