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T0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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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渭村里-民俗-民間信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
집필자 | 김기설 |
[민간신앙]
위촌리에 남아 있는 민간신앙으로는 천제와 서낭제를 들 수 있다. 이들 행사는 마을에 따라 달리 지내고 있다.
우렛말[1리 3반] 천제는 서낭 옆에 있는 제단에서 지내는데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서낭제를 지낼 때 같이 지낸다. 신위는 신목(소나무)에 모신다. 유사가 제물을 준비하는데 제물은 메 두 그릇, 백설기, 세 가지 실과(대추, 밤, 감), 나물, 쇠고기(날 것), 어물(생명태), 제주를 준비한다. 천제를 마치고 유사의 집에서 쇠고기와 어물을 삶아서 음복을 한다.
반면 망월이[1리 2반] 천제는 예전에 마을 뒤에 있는 천제단에서 지냈으나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천제단이 없어져 서낭제와 합제로 지낸다.
서낭제는 같은 1리라도 각 반마다 나눠 지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리의 서낭제 가운데 항상골[1반] 서낭제부터 살펴보자. 항상골 서낭은 서낭당 없이 고목에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서낭제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지낸다. 서낭에 모신 신위는 성황신(城隍神), 토지신(土地神), 여역신(厲疫神)이고, 제물은 동네 기금으로 유사가 준비한다. 메 세 그릇, 쇠고기(날것), 어물(날 것), 대추, 피밤(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 감, 채소(움이 난 무 토막 두 개), 나물을 쓰고 제주는 사다 쓴다. 헌관은 3헌관인데 초헌관은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맡는다. 홀기와 축이 있다.
망월이[2반] 서낭제도 서낭당 없이 바위 위에 솟은 고목에 신위를 모신다. 제례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지낸다. 예전에는 천제사를 지내고 서낭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천제단(마을 뒤에 있었음)이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져 서낭에 모아 합제를 올린다. 신위는 천지신, 서낭신, 토지신, 여역신을 모시고 3헌관이 절을 올린다. 제물은 메 한 그릇, 황우(날고기), 황계(날고기), 생선(날고기), 떡, 무(움이 난 것 두 토막), 제주(제주는 서낭 앞에 단지를 묻고 담근다)를 쓴다. 예전에는 천제사 축과 서낭제 축이 달이 있었으나 지금은 천제와 서낭제를 하나로 만들어 쓰고 있다.
우렛말[3반] 서낭은 당이 없이 소나무에 신위를 모신다. 제례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지내는데 하늘에 지내는 천제사와 서낭제를 한 곳에서 같이 지낸다. 신위는 왼쪽에 천지지신, 오른쪽에 성황지신을 모시는데 천제사의 축을 먼저 고한 다음 성황제의 축을 고한다. 제물은 생메(두 그릇), 쇠고기(날고기), 어물(날고기), 대추, 피밤(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 감, 나물, 무(움이 난 것 반 토막 두 개), 숯검정(두 접시)을 쓰고 제주는 사다 쓴다. 헌관은 3헌관이고 제례를 끝내고 도가에 와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고 마을의 대소사도 논한다.
양짓말[4반] 서낭 역시 당이 없는데, 산등성이에 흙을 돋우어 토지신, 여역신, 성황신을 모셨다. 제례는 10월 상정일(上丁日) 저녁에 지내는데, 유사는 제례 전에 서낭 앞에다 금줄을 친다. 헌관은 3헌관이고, 초헌관은 제일 연장자가 맡는다. 제물을 메 세 그릇으로 생융에 담고, 시루떡 세 그릇, 육회(생육), 생선(어회), 대추, 밤(피밤), 감, 메나리, 소금, 무(싹이 난 부분 반 토막)을 쓴다. 홀기는 없고 축은 간단히 고하고, 제사가 끝나고 유사집에 모여 음복을 한다. 제주는 담그는데 서낭 앞에 구덩이를 파고 단지를 묻는다.
문옥이 서낭제는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마을이 없어져 천제사와 서낭제도 없어졌다.
위촌2리는 새잇말, 송두, 대장골, 골아우, 솔안, 아랫말에서 서낭제를 지냈으나 몇 해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대장골 서낭제는 10여 년 전부터, 솔안 서낭제는 태풍 루사(2002년) 때 서낭당이 떠내려간 다음부터, 골아우 서낭제는 2000년 마을 사람들이 떠나면서 지내지 않게 되었다.
위촌리의 서낭 가운데 독특한 것이 독서낭[1리 3반]이다. 독서낭은 우렛말 산기슭에 있는데 할머니가 혼자 모신다. 이 분은 예전에 이 마을(방학교 부근)에 살다가 지금은 시내에서 산다. 예전에 집안에 우환이 자주 생겨 서낭당을 지어 모셨다고 한다. 자손이 없이 혼자 지내는데 현재 모시는 분(이계옥)의 시어머니 때부터 독서낭을 모셨다고 전한다.
위촌리에는 돌에 소원을 비는 암석 숭배 형태의 민간신앙도 전해진다.
암석 숭배 가운데 전국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남근석 숭배의 풍습이 위촌리에도 남아 있다. 마을 들머리(수붕구)에 남근처럼 생신 바위(좆바위)가 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한 부녀자들이 이 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리며 손으로 만진다. 부녀자들은 자신의 은밀한 곳에 바위를 대보기도 한다. 이렇게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 바위 앞으로 마을에서 흘러온 물이 흘러가는데 물이 바위 바로 밑으로 흘러가면 마을에 인물이 나고, 조금 멀리 돌아가면 마을에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한편 마을 들머리(수붕구) 산기슭에는 여근처럼 생긴 바위(보지바위)가 있는데 남근석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생산의 기능을 한다고 믿는다.
또 골아우에는 고래처럼 생긴 고래바위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