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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417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Roman Catholic Church
영어음역 Cheonjugyo
영어의미역 Roman Catholicism
이칭/별칭 구교(舊敎),가톨릭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강릉시 일원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춘근증보:전제훈

[정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파.

[개설]

천주교는 조선시대의 지속적인 박해로 말미암아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천주신앙에 입문했던 지식계층의 지도자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교세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점차 확대되었는데, 이에 따라 천주교의 신앙도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일반 민중의 복음적인 신앙으로 변모해갔고 신앙의 중심지도 산간 벽지로 이주한 교우촌(敎友村)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특이한 사항은 천주신앙을 접하고 입교할 때 부모나 가족공동체의 영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탄압 역시 개인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가족을 대상으로 취해졌고, 사학도당(邪學徒黨)이라는 지목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 공동체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날 목적에서 신자들 위주의 교우촌(敎友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앙의 통제와 정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그런데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음을 감안할 때 산지가 많고 지형이 험준했던 강원도가 우선 유력한 피신처로 떠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帛書) 가운데 ‘경기·충청·전라 3도에는 원래 교우가 많고, 경상·강원의 양도에는 근년에 피난자가 많이 흘러 들어갔다. 교우를 잡아내는 관리는 이상 5도를 샅샅이 두루 돌아다닌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경기·충청·전라도는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 많은 천주교도들이 있었으며, 경상·강원도 지역까지 천주교도의 이주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 이후임을 알 수 있다.

[강릉지역의 천주교 유입]

강원도 영동 지역의 천주교 유입은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대원군에 의해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학살이 가해졌던 병인박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동 지역의 천주교 유입 경로는 크게 남한강 유역의 광주(廣州)·양근(陽根) 지역과 강원도 남쪽 접경 지역인 제천 및 서울과 가까운 지방의 입구인 횡성을 경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주와 양근은 천주교 수용 시기에 남인 계통의 지식인들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했던 지역일뿐더러 정약용 형제 등의 전교 활동도 있었던 곳으로 처절한 박해가 가해지기도 했던 한국 천주교의 요람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천과 횡성은 초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모이면서 집단 이주촌이 형성되었던 배론 사적지와 풍수원(豊水院)성당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원도 지역의 천주교 전교는 강원도 북쪽과 남쪽의 길목인 이들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경로를 정리해 보면, 남한강 유역에서는 광주 또는 양근-북한강-샛령[미시령과 진부령 중간에 위치]-영동 북부가 될 것이고, 풍수원에서는 횡성-평창-강릉이 될 것이고, 배론에서는 제천-영월-평창-강릉으로 추정된다.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심산유곡으로 이주하게 된 천주교도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이주촌 곧, 집단 부락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들 집단 부락을 거점으로 초기 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만 성사(聖事)가 집행되는 곳]가 자연스럽게 설립되었다.

영동 지역의 초기 천주교 집단 부락은 그 유입 경로를 따라 요소요소에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집단 부락은 당시 교통과 정보의 통로인 도로와 역로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신앙의 자유와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폐쇄적 지형을 끼고 형성되었다. 신앙과 신변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인 조건과 함께 지속적인 전교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 문제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 집단 부락이 형성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화전이 가능한 지역, 옹기를 제작할 수 있는 지역이 집단 이주지로 적합하였다. 특히 옹기를 굽기 위해서는 흙, 물, 땔나무와 인력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영동지역은 이 경우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적임지였다. 집단 부락을 이룬 천주교도들은 적게는 몇 십 명, 많게는 몇 백 명씩 모이게 되었는데, 모여든 이들의 신앙생활과 전교를 위해서 공소가 설립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금광리공소는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 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동 지역 최초의 공소는 금광리공소가 아니고 현재는 없어진 구정면 금광리 삼정평공소로 추정하고 있다.

[강릉지역의 본당 설립]

1920년대에 이르러 영동 지역 가운데 양양과 강릉 지역이 중심이 되어 공소들이 발전하면서 1921년에 영동 지역에는 양양, 강릉의 2개의 성당이 생기게 되었다. 원산성당에 소속되었던 강릉 지방은 이철연(李喆淵)[방지거] 신부에 의해 ‘금광리성당’이 세워졌다. 금광리성당 지역에는 양양의 견불리[현 양양군 현남면], 강릉의 제비골[현 강릉시 구정면금광리[현 강릉시 구정면]·오일골[현 강릉시 옥계면]·정선의 느랏[현 정선군 임계면] 등 5개 공소에 227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금광리성당은 2년 후인 1923년에 경성교구의 지시로 주문진 교항리에 10칸 상당의 가옥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는데 그 해 11월에 본당으로 발족하였다.

1928년에 이철연 신부가 용소막성당으로 전임됨에 따라 김인상(金寅相)[야고보] 신부가 주문진성당의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김신부는 주문진성당의 신자 수 부족과 1929년 1월에 발생한 화재로 성당이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단 성당을 금광리로 이전하였다.

1931년 6월에 강릉읍 임정(林町)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여 성당 건물로 사용하다가 1934년에 지금의 강릉 시내 임당동으로 이전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임당동 성당 자리이다.

1937년의 신자 총수는 699명이었는데 이는 성당이 세워진 지 16년 만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성장을 가져온 것이었다. 금광리의 성당은 본당이 강릉으로 나감에 따라 공소강당이 되었다가 8·15 해방 이후에는 지금의 금광리공소로 옮겨지면서 상당히 축소되었다.

1946년 6월에 임당동성당은 소속 건물 약 60여 평을 할애하여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야간중등과정인 성심공민학교를 만들었다. 이 학교는 성심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그 후 10여 년에 걸쳐 42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당국의 인가를 얻지 못해 1957년에 자진 폐교하였다.

임당동성당은 1964년에 호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에 의해 갈바리의원이 문을 열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으며, 1967년에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1973년에는 교인들이 강릉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974년 11월에 옥천동성당, 1987년에는 노암동성당, 1996년에는 초당성당, 2004년에 솔올성당, 2008년에 입암성당이 세워지는 등 주문진성당과 옥계성당을 포함하여 강릉 지역에는 모두 8개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강릉 지역의 천주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음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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