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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390
한자 昌寧曺氏
영어음역 Changnyeong Jossi
영어의미역 Changnyeong J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집성촌 강원도 강릉시 유산동|강원도 강릉시 난곡동|강원도 주문진읍 교항리|강원도 강동면 신석리|강원도 구정면 학산리
입향시기/연도 1592년연표보기
성씨시조 조계룡(曺繼龍)
입향시조 조학서(曺鶴瑞)|조철(曺哲)

[정의]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창녕조씨의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계룡(曺繼龍)이다.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德曼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입향경위]

강릉에 입향한 시조는 부원군파(府院君派)의 후손인 직장공(直長公) 조철(曺哲)과 창산군파(昌山君派)의 후손인 조학서(曺鶴瑞)이다. 조학서(曺鶴瑞)는 임진왜란 때 중형인 조기서(曺麒瑞)와 함께 관동 지방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중형은 귀경하고 본인은 처가 영해이씨 가문이 있었던 강릉에 머물다가 강릉부성동촌(江陵府城東村), 즉 지금의 옥천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직장공 조철(曺哲)창녕조씨 시조 조계룡의 30세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하여 강원도 관찰사 조문수(曺文秀)의 아버지이며 후에 이조참판을 지낸 재종제(再從弟) 하산군(夏山君) 조경인(曺景仁)과 함께 강릉부 운정동 선교촌에 와서 여러 해 동안 체류하였다. 후에 조경인은 귀경하였고 조철은 강릉 북평촌[현재의 죽헌동 일대]에 세거하고 있던 안동권씨 권화(權和)의 딸과 통혼을 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세거현황]

창녕조씨들의 세거지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이다.

[집성촌 현황]

1929년 기준으로 조사된 창녕조씨 집성촌은 강원도 강릉시 유산동, 난곡동, 주문진읍 교항리, 강동면 신석리, 구정면 학산리 등이었다. 강원도 강릉시 유산동에는 60호에 300여명이, 난곡동에는 30호에 150여명이, 주문진읍 교항리에는 30호에 150여명이, 강동면 신석리에는 30호에 130여명이, 구정면 학산리에는 40호에 180여명이 거주하였다. 현재까지도 강원도 강릉시 유산동, 난곡동, 학산리창녕조씨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묘역]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운계동(雲溪洞)에 입강시조인 직장공 조철의 묘역 관리를 위한 재실 영형헌(永亨軒)이 있고, 그 뒤쪽에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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