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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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峴城 |
영어음역 | Wanghyeonseong |
영어의미역 | Wanghyeo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장안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흥술 |
성격 | 성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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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토석혼축성 |
건립시기/연도 | 미상 |
관련인물 | 고려 공양왕 |
길이 | 약 546m |
둘레 | 약 546m |
면적 | 약 89,500㎡ |
소재지 주소 |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
소유자 | 강릉시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왕고개의 북동쪽 구릉상에 있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개설]
왕현성에 대한 사료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근간에 간행된 자료들이 민간에 전해오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는 강릉의 남쪽 약 1리, 학산리 북서 구릉상에 있는 토루(土壘)로서 둘레 약 300간이며, 일반에서 장안성지라 칭하며, 강릉이 예국의 도읍이었을 때 축성되었다고 하며, 또한 고려 공양왕 때 우왕과 창왕이 축조하였다고도 한다. 두 번째는 구정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 위치하며,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잠시 피난하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고 있다가 이성계의 침략을 받아 삼척에서 화를 당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현재는 500~600m의 포곡식 석축(包谷式石城) 흔적이 있다. 세 번째는 시의 서남쪽 6㎞ 구정면 학산리 왕현(王峴)에 있는데, 둘레와 높이는 상세치 않고 우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서 한 때 여기에 와 있으며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건립경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는 예국 시대에 축성되었고, 고려 말의 정치 상황과 관련지어 성의 축조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는 고려 말 공양왕의 행재성 으로서의 성의 기능과 규모를 기록하고 있으며, 『임영지(臨瀛志)』에서는 일반이 알고 있는 구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에서 성의 규모와 토루라고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는 성의 축조 시기 및 연혁에 대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왕현성에 대한 옛 기록이 전무한 것은 성이 외적에 대한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이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고려 공양왕의 피난처로 축조된 행재성류의 성으로 전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일반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해오는 전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 왕조에 대해 향수를 지닌 민간에 의해서 장안동, 궁궐지, 왕고개 등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왕현성이라 불린 것도 같은 이유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존재했던 성으로 생각되며 쫓겨난 왕이 성을 축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치]
왕현성은 북쪽에 장현(長峴)저수지가 있고, 서북과 남서쪽에는 넓은 들이 있으며, 남서에서 북동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해발 50m 정도의 구릉을 따라 축조되었다.
왕현성이 위치한 야산은 해발 60m 정도의 3개의 봉우리와 남동쪽으로 2개의 소곡지(小谷地)를 포함하고 있으며, 서북쪽이 급사면을 이루고 남동으로 완만하게 평지를 이루며 형성된 곳이다.
[현황]
현재 성곽 주변에는 약 4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남쪽 입구 양쪽에 있다. 그리고 성의 남부는 낮은 골짜기가 있고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지가 있다. 석천서원이 이곳에서 비록 30년을 채우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언별리)로 이건하였으나 서원이 있을 당시 왕현성의 성벽은 서원의 담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담장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546m 정도이고 크기 25~40㎝의 변성암 등으로 쌓은 토석혼축성이다. 성돌은 구정천의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남부 평탄부에 건물지가 있으며, 성 바깥쪽에 우물지가 있다. 성의 토축부와 외부 경사면에서 신라토기편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편이 수집되기도 하였다. 성의 남쪽 바깥 부분 골짜기와 평탄한 곳은 경작지와 민가 2가구가 있다. 시내에서 금강리, 학산리로 가려면 왕현성의 남서쪽 왕고개를 넘어야 했으며, 1980년대 후반 왕고개 주변에 새 길이 났다.
[의의와 평가]
왕현성은 정확한 축조 기록을 알 수 없는 고대 성곽이지만 전설에는 고려왕조의 멸망과 관련 있는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미루어 역사성과 진실성이 없는 근거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시대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