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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492
한자 呂運亨
영어음역 Yeo Unhyeong
이칭/별칭 몽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최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정치가
출신지 경기도 양평
성별
생년 1886년연표보기
몰년 1947년연표보기
대표경력 조선인민당 당수

[정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학력]

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했으며, 1902년 관립우체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군호를 안 쓴다는 이유로 강릉으로 퇴거 명령을 받았다.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 1917년 졸업하였다.

[경력]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해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하였으며, 1946년에는 29개의 좌익 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7년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내며,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 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활동사항]

1910년 관동학회 남궁억의 초청으로 강릉 초당의숙(草堂義塾)의 교사로 초빙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학교로도 불리던 초당의숙에서는 영어와 한글, 산수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당시에 생소했던 축구, 야구, 빙상 스케이트 등 신식운동도 처음 시작하였다. 또한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내에 설립된 동진학교(東進學校)에도 가끔 출강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해 11월 여운형을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내용의 인물이 활동한 시기와 사진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운형이 가르치던 학교가 폐교된 후 동일한 장소에 다른 학교가 생긴 것이라면 그 내용을 수정보완해주시고, 동일한 학교가 아니라면 사진이 오히려 혼돈을 줄 수 있으니 다른 사진으로 교체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답변
  •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운형에 수록된 사진은 초당의숙과 다른 학교여서 삭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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