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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602
한자 朴遂良
영어음역 Park Suryang
이칭/별칭 군거(君擧),삼가정(三可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도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박승휴(朴承休)
어머니 영해이씨 이중원(李仲元)의 딸
출신지 강릉
성별
생년 1475년(성종 6)연표보기
몰년 1546년(명종 1)연표보기
본관 강릉
상훈 정려(旌閭)
제향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2920-16[교동 238-3] 향현사지도보기
대표관직 현감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생애]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18년(중종 13) 7월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겨울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박공달(朴公達)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갈 생각은 않고 오직 산수(山水)를 벗 삼았다. 하루는 과거에 급제한 고향 사람이 방문하였는데, 박수량(朴遂良)의 어머니가 그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박수량(朴遂良)은 “무릇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이라 하여 마침내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모친상을 당해 대과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때가 마침 연산군이 삼년상을 27일 만에 탈상하도록 하는 단상제(短喪制)를 매우 엄하게 시행할 때였다. 그러나 박수량(朴遂良)은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을지언정 선왕(先王)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 하여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1518년(중종 13) 7월 별과피천(別科被薦)으로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중종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 중종박수량(朴遂良)에게 “요 순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그 맛이 썼으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단 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또한 어찌 고금(古今)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 못할 리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은 탄복하였다고 한다.

용궁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가 토지 문제로 오래도록 다투어 왔으나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불러 술을 권하면서 타이르기를 “토지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렵다. 내가 덕이 없어 너희들이 이렇게 싸우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희들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하겠느냐.” 하고 눈물을 흘리니, 두 형제는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고 마침내 그 소송문서를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저술]

문집으로 『삼가집(三可集)』이 전한다.

[묘소]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08년(중종 3)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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