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949 |
---|---|
한자 | 金陽 |
영어음역 | Kim Yang |
이칭/별칭 | 위흔(魏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창겸 |
성격 | 귀족|대신 |
---|---|
아버지 | 김정여(金貞茹) |
출신지 | 경주 |
성별 | 남 |
생년 | 808년(애장왕 9) |
몰년 | 857년(문성왕 19) |
본관 | 강릉 |
추증 | 서발한 |
대표관직 | 병부령 |
[정의]
신라 하대의 귀족이자 대신.
[가계]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9대손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김정여(金貞茹)이다. 딸은 문성왕의 왕비이다.
[활동사항]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소경(中原小京) 대윤(大尹),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죽은 뒤 김균정(金均貞)과 김제륭(金悌隆)[희강왕]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김양(金陽)은 김균정을 왕으로 추대하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으로서 숙위했으나 김제륭 일파의 기습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때 김양은 김제륭의 부하인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은 채, 포위망을 뚫고 경주 북쪽인 한기(漢岐)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838년(희강왕 3) 1월에 상대등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김양은 2월에 병사를 모집해 청해진(淸海鎭)으로 떠났다.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과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와 민애왕을 타도하기로 모의하고, 838년 3월 강병 5,000명으로 무주를 습격·함락시키고 다시 남원으로 진출해 중앙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피로한 기색을 보이자 일단 청해진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같은 해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서 장보고 휘하의 강병 5,000명을 이끌고 경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김양의 군대는 무주 철야현(鐵冶縣)에서 김민주(金敏周) 휘하 중앙정부군의 저항을 받았으나, 기병 3,000명으로 적진에 돌격해 이를 섬멸하였다.
이어 839년 정월에는 달벌(達伐)[지금의 대구]로 진격하여 민애왕이 거느린 정부군을 격파하고 왕도 죽였다. 이로써 경주의 왕성(王城)을 수복한 김양은 김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배훤백을 비롯하여 민애왕 정권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관대하게 용서하여 인심을 얻었다.
839년 7월 신무왕이 죽음에 아들 문성왕이 즉위하였는데, 김양은 소판(蘇判)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 받았다. 그 뒤 이찬(伊湌)에 올랐고, 847년(문성왕 9) 8월에는 시중(侍中)이 되어 이듬해까지 재임하였다. 이후에도 병부령(兵部令)으로서 문성왕에 중용되었으며, 당(唐)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받았다.
한편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들여보내려 함에, 김양은 그를 제거하고 도리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게 하여 문성왕의 장인이 되었다.
[묘소]
부의(賻儀)와 염장(殮葬)을 모두 김유신(金庾信)의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으며,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상훈과 추모]
부음이 전해지자 문성왕은 김양을 서발한(舒發翰)으로 추증하였다. 또한 증조부인 명주군왕 김주원, 할아버지인 명주군왕 김종기, 아버지인 명원공 김정여에 이어 명원군왕(溟源郡王)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