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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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石文 |
영어음역 | geumseongmun |
영어의미역 | Metal and Stone Inscription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임호민 |
[정의]
철이나 청동 등 쇠붙이나 석재(石材)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개설]
금석문이란 고대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보통 금속에 새겨진 문자와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나무에 새겨진 문자나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역사와 변천]
비석문은 돌을 다듬어서 세운 비석에 새긴 문장으로, 기록된 정보량이 많고 남아 있는 숫자도 비교적 많아 금석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비석은 비(碑)와 갈(碣)로 나누기도 하는데, 비는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 다듬은 것으로 5품 이상 고위 관료만이 세울 수 있었다. 갈은 자연석의 한쪽 면만을 다듬어서 둥글게 만들었으며 6품 이하가 쓰는 비석이었다.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통용되는 예가 많았다. 비와 갈 모두는 중국 한(漢)나라 때 묘비(墓碑)로부터 출발하여 발달했으며, 원래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였다가 역시 한나라 때부터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강릉 지역에는 고려 초에 세워진 낭원대사오진탑비가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데 보현사와 낭원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묘지는 죽은 이의 신원과 생애, 태어나고 죽은 해 등을 기록한 것이다. 현실(玄室), 즉 무덤방이 있는 경우 그 벽면에 내용을 직접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石棺) 안쪽면 혹은 별도의 석판에 이를 조각하여 시신과 함께 안치하게 된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은 이 무덤 주인공과 백제 왕실의 국상(國喪), 장례(葬禮) 풍습을 알려준 귀중한 자료이다. 사각형의 판석(板石) 2장에 무녕왕과 그 왕비의 묘지를 각각 음각하여 기록했다. 또 그 뒷면에는 왕릉의 위치를 표시한 방위도와 왕릉이 들어설 땅을 땅의 신으로부터 매입했다는 매지권(買地券)이 적혀 있어, 중국 남조(南朝) 장례문화를 백제가 수용한 흔적을 보여 준다.
고려 귀족들도 묘지석을 만들어 사용했다. 현재까지 300여 점의 묘지가 실물로 발견되거나 혹은 문헌 기록에 실려 있다. 그 주인공 가운데는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 같은 문헌사료에 실려 있지 않은 인물도 있고, 실려 있더라도 새로운 내용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어 고려시대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조선에 들어오면 고려처럼 석판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청자나 백자(白磁)를 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청색 안료로 묘지를 쓴 예들이 나타난다. 여러 장일 경우는 각각에 번호를 적어 순서를 표시했다. 강릉 지역에서는 주로 조선조에 만들어진 지석들이 전해지는데 ‘권사균묘지명(權士鈞墓誌銘)’을 비롯하여 다수의 지석이 발견되어 관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불상 명문은 금동불이나 철불의 광배 뒷면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음각하여 기록하지만, 일부 석불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예가 있다.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었는데, 광배 뒷면에 4행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강릉 인근인 동해시 삼화동 삼화사 철불의 등에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종을 제작할 때 그 종교의 교의(敎義)를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주조하게 된다. 역대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종들을 보면, 제작 시기와 유래, 금속 원료의 양, 책임자, 실제 종을 만든 장인(匠人), 제작비를 분담한 사람의 직위와 명단을 적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범종은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인데, 특이하게도 종의 윗면에 신라 성덕왕 24년(725) 진골귀족 가문의 시주를 받고 승려들이 참여하여 이 종을 제작했음을 기록했다.
칼에 새겨진 명문의 예는 많지 않고, 조선시대 도검은 그나마 간단한 길상구(吉祥句. 행운을 가져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형식적인 문구)나 별자리 그림을 상감처리(표면에 오목한 홈을 만들고 다른 색깔의 재료로 그 안을 채워 넣어 문양이나 문자를 표현하는 방법)한 정도가 많다. 우리의 경우는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이다. 현재 일본 천리(天理)시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고 검신 좌우로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특이한 형태이다.
이 칼의 앞뒷면에 모두 61자의 명문을 금(金)으로 상감하여 기록했다.
잣대 혹은 막대 모양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에 문자, 그림을 적어 의사를 전달한 것이 목간이다. 묵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음각하거나 다시 그 홈에 묵서를 덧씌운 예도 있다. 잣대 모양은 앞, 뒷면에 문자를 기록하기도 하고, 막대 모양은 네 면을 모두 활용하기도 한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되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주로 쓰였지만, 그 후에도 나무 재료의 특성 때문에 표찰, 패찰(牌札) 등의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반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에서 50여 점의 통일신라 목간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00여 점이 발견되었다.
생활용품인 토기에는 경우에 따라 명문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단순한 기호나 한 글자만 적힌 것, 그림을 그려 넣은 것도 있지만 상당히 긴 문장을 기록한 예도 있다. 기록 방법은 뾰족한 도구로 각서(刻書)하거나 묵서로 썼다. 위치는 토기의 몸통 겉면이 대부분이지만, 바닥, 뚜껑, 안쪽에 적기도 해서 일정하지 않다.
기와는 지붕에 얹는 건축 부재이고, 전돌은 무덤을 쌓거나 요즘 보도블록처럼 바닥에 까는 재료이다. 기와는 암키와의 내면(볼록한 면)과 배면(오목한 면), 그리고 숫막새기와의 막음 부분에 명문을 음각 혹은 인각(印刻)한다. 전돌은 주로 측면에 명문을 양각 혹은 음각해서 넣었다.
전통시대에 기와, 전돌은 왕궁, 관청, 사원 같은 고급 건물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과 무덤의 용도, 주인공을 알려주는 문자를 와전에 기록하게 되기 때문에 그 내용은 간단한 문구로 구성되지만, 출토 유구(遺構)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광개토대왕릉 부근에 있는 대형 적석총에서는 “태왕릉이 산처럼 편안하고 굳세기를 기원한다(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이라 쓴 전돌이 발견되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비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목판에 새겨진 현액과 현판도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현액과 현판은 주로 전통시대 목조 건축물에 내 외부에 걸려 있다. 대체로 현액에는 건물명이나 귀감이 될 수 있는 큰 글자가 음각 또는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현판에는 건물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기문, 중수 또는 이건 사실을 적은 중수기와 이건기, 건물 신축 민 증축시 상량한 후 작성한 상량문 등이 있다. 또 누정이나 별당 건물처럼 문객들이 빈번히 출입하는 곳에는 유명 문객이 지은 한시가 현판에 새겨져 걸려 있는 경우도 많다.
이밖에 울주 천전리 서석(書石)처럼 암벽에 글자를 새기거나 성벽을 쌓은 성돌 등에 새긴 석각(石刻), 석탑의 탑신부에 각자(刻字)한 석탑기, 금속판이나 석판에 탑 조성에 관한 사항을 적어 탑 안에 넣은 탑지(塔誌), 각종 인장의 인문(印文), 동경(銅鏡)의 명문, 벼루 등 각종 용구에 적힌 묵서 혹은 각자명, 사리함, 청동합 등 각종 금속 제품에 새긴 금문, 낙랑 유물로서 문서 봉함(封緘)에 사용된 봉니(封泥)의 명문, 칠기의 묵서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