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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612
한자 月弄里堂山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문화유산/무형 유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월롱리 미륵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당집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월롱리 미륵동
성격 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신당/신체 당집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월롱리 미륵동에서 매년 마을의 당산신에게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공동 제사.

[개설]

시종면 월롱리 미륵동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을 비는 뜻에서 당산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 비용을 걷어서 제물을 장만하고 대표자를 선정하여 모신다.

[연원 및 변천]

월롱리에는 본래 마을 서쪽 입구와 동쪽 당산메라고 불리는 두 곳에 당산이 있었다. 마을 서쪽 입구에는 원래 할아버지 당산이라 불리던 큰 소나무와 귀목들이 있었는데 수십 년 전 큰 태풍으로 소나무가 부러져 고사한 후에 그곳에서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

할머니 당산은 회나무와 탱자나무 등이 서 있는 곳인데, 회나무 아래 제단을 마련해서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마을 회의를 거쳐 1998년에 당집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3년 현재 당집에는 ‘당산제각(堂山祭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맞배지붕에 좌우 1칸의 규모이며, 주위에 돌담이 둘러 있고 입구에는 쇠창살의 대문을 달았다. 당집의 전체 건축비는 4,375만 원이었는데, 3,500만 원은 군에서 보조를 받고 나머지 875만 원은 마을 자금에서 충당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원래는 회나무와 탱자나무 등이 서 있던 곳이 할머니 당산이었는데, 1998년에 당집을 지어서 당집 안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절차]

음력 1월 10일경에 마을 책임자와 유지 및 어른들이 참석해 당산제를 위한 회의를 한다. 집안에 유고(有故)가 있거나 궂은일이 있는 사람은 피하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고 좋은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다. 예전에는 집사 2명, 축관 1명, 헌관 3명, 뒷심부름을 하는 사람 2~3명까지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헌관을 한 명으로 축소하고, 이장이 헌관이 된다.

예전에는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그날부터 자기 집 대문에 금줄을 걸고 황토를 깔며, 외부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다. 혹시 궂은일이 있는 사람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근신을 하는 것이다. 또 이들은 당산제를 모시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면 손발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먹는 것을 줄였다고 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선정된 날부터 집안에만 머물러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만 서로 만나 일을 한다. 당산제를 모시고 나서도 1년간 또는 2~3개월간 궂은 곳의 출입은 삼갔다고 한다.

제관 집과 당산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다. 금줄은 왼새끼에 백지를 끼우며, 당산 주위에 대나무를 세우고 금줄을 묶어 두른다. 금줄이 쳐진 후에는 당산제를 모시기 전까지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을에서 깨끗한 집을 골라 그 집 안방에 제주(祭酒)를 앉힌다. 제주를 앉힌 집에서 제물 역시 장만하게 되는데, 안방에는 가족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에 관여하는 사람들만 출입이 허용된다. 대문간에도 영(令)대를 세우고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회관에서 모든 것을 장만하며, 제주는 만들지 않는다.

제비(祭費)는 호구전(戶口錢)으로 걷어서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이장과 제관 몇 사람이 장을 보러 간다. 돼지머리·과일·숭어·나물 등을 사며, 대나무 바구니·돗자리·한지·초·솥·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전부를 매년 새로 구입한다.

음력 1월 14일 저녁이 되면 당산과 마을을 돌면서 농악을 치고, 마을 회관 앞에서 굿놀이를 즐긴다. 자정 무렵 제사를 모실 시간이 가까워 오면 마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도록 당산에서 나발을 불고 징을 친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에 머물러 있고 일체 출입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신호다.

마을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후에 제관들은 제물을 당산에 옮긴다. 사람이 많으면 들고 옮기고, 사람이 적으면 지게에 짊어지고 간다. 요즘은 차에 싣고 간다. 제물을 진설하고 당집 안에 제상을 차린다. 제사에는 집사·축관·헌관이 참여하며, 제사를 모실 때는 농악대는 참여하지 않는다.

음복이 끝나고 나면 헌식(獻食)을 하는데, 미륵동에서는 헌식을 하는 것을 ‘넋 준다’고 말한다. 미륵동에서는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대개 두 시간 동안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음식을 모아서 제물을 장만했던 집이나 마을 회관에 돌아온다. 당산제에 썼던 음식은 제관들 이외에는 일체 먹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 짐승들에게도 행여 해가 될까봐 주지 않는다.

제관들이 당산제를 다 모시고 돌아올 때 다시 징이나 나발을 불어 당산제가 끝났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축문]

유 세차 모년 모월 모삭 ○○ 감소고우복이 천양지간 신인구의 자고자토 유신시희 연연인사 정월지망 길경위치 시월경향 복유 경석오복 재법육극 가무구려 야무실색 입무촌와 출무관변 촌갑고창 농정흔변 현초가항황 분격양수 아복아양양 재상감천 경과소격 상 향(維 歲次 某年 某月 某朔 ○○ 敢昭告于伏以 天壤之間 神人俱依 自古玆土 惟神是希 年年禋祀 正月之望 吉○爲○ 是月敬饗/伏惟 敬錫五福 災法六極 家無遘厲 野無失穡 入無村訛 出無官變 村甲高唱 農丁欣忭 玄髫歌巷黃 분擊壤壽 我福我洋洋 在上敢賤 經果昭格 尙 饗)

[부대 행사]

제관들은 제사가 다 끝나면 때로는 마을 회관에 모여 밤이 새도록 놀거나 다음날 아침에 다시 모여 제물로 썼던 음식으로 함께 식사를 한다. 당산제를 모시고 나서 따로 마을 회의를 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짚을 걷어서 줄을 만들어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했다. 동서로 편을 갈라 각각 따로 줄을 만들어 마을 앞 보리밭에서 단판 승부로 줄다리기를 했다. 단판 승부이기는 하지만 줄다리기를 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놀이와 농악놀이를 즐겨 단순하지는 않았다. 줄다리기는 일제 강점기까지 전승되다가 8·15 해방 후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에는 보름날 오전에 마을 회관 앞에서 농악을 하면서 노는 정도다.

[현황]

미륵동에는 당산제와 관련된 영험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전설보다는 마을 주민들의 경험적인 이야기들이라서 미륵동 사람들은 당산제의 전승 의지가 더 강하다. 특히 이런 영험한 이야기들이 새로 당집을 지은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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