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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야리 서촌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601
한자 沃野里西村堂山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문화유산/무형 유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서촌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당산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서촌마을지도보기
성격 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정월 14일
신당/신체 봉분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서촌 마을에서 매년 마을의 당산신에게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공동 제사.

[개설]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서촌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온을 비는 뜻에서 당산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비용을 걷어서 제물을 장만하고 대표자를 선정하여 음력 1월 14일 밤 10시경에 당산제를 지낸다.

[연원 및 변천]

옥야리 서촌 마을이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300여 년 전에 제주 양씨(濟州梁氏)서촌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서촌 마을남해포(南海浦)가 가깝고, 사정(射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 주둔지나 기와를 구운 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을 명칭도 왯굴·외얏굴·오야촌·효동·오야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서촌 마을은 원래 나주군 종남면이었는데, 1895년(고종 32)에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산리·서촌리·당두리·남성리·상동·북이시면의 중촌리·안동·남산리를 병합하여 옥야리라는 이름으로 시종면에 편입되었다. 인근 남해포 근처에는 남해 신사옥야리 고분군이 있다.

서촌 마을은 고기잡이나 개펄에서 어패류 채취 등을 했었는데 1980년대 영산강 하류 하굿둑을 막아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길이 차단되면서 어업이 중단되었다. 이후 농업으로 경제 활동이 전환되면서 마을이 위축된 면이 있다. 그래서 객지 생활을 하다 귀향한 마을 주민 박찬렬이 마을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중단되었던 당산제도 다시 복원하여 모시고, 마을의 문화 유적들을 조사하고 현창(顯彰)하는 일을 진행했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산신은 마을 앞 밭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봉분으로, 당산 할매라고 부른다. 높이는 약 1m, 폭은 지름 1.5m 정도 되는 흙으로 된 무덤이다. 서촌 마을에서는 할매 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차]

옥야리 서촌 당산제 는 몇 년간 중단한 적이 있어 옛날 방식 그대로 이어받지는 못한 것 같다. 제사 준비를 위해 당산샘을 이용하지 않고, 제사 후에 하던 줄다리기도 명맥이 끊겼다.

해마다 설날이 지나고 날을 잡아 마을 회의에서 제관을 선정하는데, 제관에 선정되면 금기를 지켜야 한다. 제사 비용은 마을 반장들이 추렴한다. 반장들을 중심으로 당산제 당일 새벽부터 준비를 시작하는데, 짚으로 새끼를 꼬아 금줄을 준비하고 황토를 퍼 와 골목에 깔며 제장 근처에서는 풍물을 친다. 사장 나무 아래에 차일을 치고, 오후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식사를 한다. 음식은 남자 방과 여자 방에 따로 두 개씩 상을 차리는데, 제사 음식과는 달리 홍어회 등 생선을 곁들인 음식이다. 여자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제관은 제사 용구를 차일 안에 옮겨 제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정돈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당산에 가서 전구를 켜 불을 밝힌다. 그리고 하얀 대접에 정화수를 담아 올려놓고, 마을 회관에 가서 대기한다.

음력 1월 14일 밤 10시에 제사 준비를 시작한다. 사장나무 옆에서 백설기 떡을 약 1되[1300㎖] 정도 하고, 밥 두 그릇과 미역국을 준비한다. 소총(小塚)거리 헌식용으로 떡을 다른 접시에 약간 담아 둔다. 또 밥과 국을 한 그릇씩 놓아두고 나머지는 제사상에 올린다. 당산제 음식은 비교적 간단한 편으로 밥·국·떡·정화수·숭어·명태 1마리·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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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이 끝나면 제관들은 제복을 갈아입고, 밤 11시 30분쯤 제를 지낸다. 축관이 따로 없기 때문에 제관이 독축까지 한다. 제사는 참신·초헌·독축·아헌·종헌·사신의 순서로 진행한다. 사신이 끝나면 주제관이 축문을 먼저 소지(燒紙)하고, 이어서 준비해 간 몇 장의 백지로 두 제관이 개인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지를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상에 차려진 음식은 음복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당산 묘 옆에 흙을 파서 헌식(獻食)을 한다. 별도로 남겨둔 떡과 밥, 국 등의 제물은 따로 들고 소총거리로 간다.

당산에서 약 200m 떨어진 마을 입구 도로 가에 있는 소총거리는 아이들이 죽으면 몰래 독무덤으로 파묻던 곳이라 평소에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린다. 12시경에 소총거리에 도착해 제관들은 음식을 소총거리에 던지며 구축(驅逐)을 한다.

소총거리에는 옛날에 마을을 위해 궂은일을 다하다 자식도 없이 죽은 희생적인 머슴 업단이를 묻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출산아, 업단아, 이 음식 잘 먹고 올해는 우리 마을에 좋은 일만 있게 도와주라.”라고 세 번 외치며 음식을 던져 준다.

헌식이 끝나면 제는 완전히 끝나게 되고 제관들은 마을 회관으로 돌아간다. 제관이 돌아오면 준비하고 있던 풍물패가 12시 10분쯤 풍물을 치며 당산으로 이동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동안에는 쇳소리를 내지 않고 다 끝나야 풍물을 칠 수 있다. 풍물패가 앞장서면 마을 사람들이 뒤따른다. 풍물패는 모두 10명이며 꽹과리 2명, 징 1명, 북 1명, 장구 1명, 소고 5명으로 구성된다.

당산제가 끝나 풍물 소리가 나면 각 가정에서는 찰밥을 하기 시작한다. 먼저 성주상에 찰밥을 올리고 김밥을 말아서 장독대나 곳간, 칫간 등에도 올려놓는다. 풍물패는 할머니 당산에서 당산굿을 5분쯤 하고 마을 공동 샘으로 가서 샘굿을 한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 시설이 있어 마을 공동 샘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샘굿은 친다.

제관 집으로 가서 문굿과 샘굿, 정지굿, 대청굿을 한다. 제관은 우물과 대청에 상을 차리는데, 정화수 한 그릇과 쌀 한 대접 그리고 돈을 올린다. 다른 제관 집에서도 똑같이 한다. 제관 집을 다 돌고 다시 마을 회관 앞으로 와 풍물을 치며 한바탕 놀다가 새벽 1시경에야 모든 제의 절차를 마친다.

[축문]

제사의 축문은 예전에 쓰던 것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지금 사용하는 것은 한문 투의 한글 음만 남아 있다.

“유세차 을유년 정월 갑자삭 십오일 정축 유학 이삼재 감소고우 사령목신 복위 천양지관 신인구이 자고자토 유신시히 매년인사 정월지망 길경위치 시월경향 복유경석 오복제거 육극가무 구여야무 실색임무 아출무간 변가갑고 창내정혼 현초가엄 활발경양수아복아 양양제상 감천주가 소격 상향.”

[부대 행사]

자정이 지나 당산제가 끝나면 나서는 풍물패는 전에는 3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요즘은 많이 축소되어 10명 정도이다. 지금은 복장도 갖추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풍물을 친다. 제관 집에 들른 후에는 원하는 집을 찾아 돌며 액맥이를 한다. 그 집에서는 돈과 쌀을 내놓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기도 한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독다리 거리에서 서촌과 중촌 대항 줄다리기를 했다. 아침부터 집집마다 짚 한 뭇씩을 걷어 와 함께 외줄을 꼬아서 마을 앞 큰 나무에 걸고 더 크게 꼰다. 정오 무렵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한다. 어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은 없으며,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도 태운다. 승패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 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뒤풀이를 한다.

또한 인근 와우리(臥牛里), 월롱리(月弄里)옥야리는 서로 불 싸움을 하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날 전부터 아이들의 싸움으로 시작하다가 정월 대보름날은 청년들의 싸움으로 확대된다. 싸움이 거세져서 다치는 사람도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줄다리기나 불 싸움은 하지 않는다. 당산제 결산은 연말에 마을 총회에서 한다.

[현황]

서촌 마을에는 당산제와 관련된 여러 영험한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미 고인이 된 서촌 마을의 박남수(朴南洙)나 박찬국은 딸만 네댓 명을 낳았는데, 제관이 되어 정성껏 당산제를 지낸 후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는 득남을 위해서나 집안에 특별히 기원할 일이 있으면 자진해서 제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60여 년 전에는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에 마을에 전염병이 돈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제사를 잘못 지내 마을에 액운이 끼었다고 생각하고 2월 초하루로 날을 잡아 다시 제를 지낸 적이 있다. 상촌에서는 중촌, 서촌과 달리 당산제에 무관심하다가 마을에 자꾸 불운이 겹치자 당산제를 안 지내서 그렇다고 믿고 별도의 날을 잡아 밤에 몰래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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