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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160
한자 靈巖五日場
이칭/별칭 읍내장,영암 5일 시장,영암 달마지 시장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333-1번지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관|개장 시기/일시 1964년 - 영암 오일장 장옥 건설
현 소재지 영암 오일장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333-1번지지도보기
성격 시장
면적 6,880㎡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에 있는 정기 시장.

[건립 경위]

영암 오일장은 5일과 10일에 서는 오일장으로, 공식 명칭은 ‘영암 5일 시장’이다. 세칭 ‘읍내장’이라고도 한다.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333-1번지 장터 마을에 있는데, 조선 시대에 영암읍성의 동문 밖에 형성되어, 독천장과 함께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조선 시대의 역로가 나주~영암읍성 동문~강진~해남을 연결하였으므로 영암 오일장은 육상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영암 오일장은 동문 삼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신작로 주변에 형성되었다가 1964년에 장옥이 만들어졌다.

영암군 유통망의 거점이었던 영암 오일장은 서쪽의 드넓은 영암만 바다와 접하고 있었고, 영암만의 덕진포로부터 갯벌과 바다에서 나는 숭어, 장어, 낙지 등의 해산물이 유입되었다.

[변천]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하면, 1470년에 전라도의 모든 읍에서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장문(場門)을 열고 있다고 하였다. 장문은 사람의 출입이 빈번한 읍성의 성문(城門) 주변에 시장이 형성된 것에서 이름이 유래하는데, 장시(場市)의 옛 이름이다.

영암 오일장의 경우도 동문 밖 장문에 해당하며, 조선 전기 성종 무렵에 이미 출현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영암 오일장의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후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야 처음 나오고, 이후 여러 기록에 계속 등장한다. 영암 오일장은 1980년 무렵에 덕진장을 흡수하였다.

[구성]

영암 오일장의 부지 면적은 6,880㎡이다. 1,125개 상가, 134개 점포가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영암 오일장의 상인 수는 342명[노점상 154명]이다. 영암 오일장은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행정·서비스 기관이 밀집해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한다. 하지만 영암 오일장의 성황은 다른 면 단위 장들의 상대적 위축을 가져왔다. 예컨대 인근 덕진장은 1980년 무렵 완전히 소멸되었다.

예전에 영암 오일장에서 읍장에서 거래되는 죽물은 담양에서, 공산품은 광주 양동시장에서 들어왔다. 영암의 특산물 중에는 망호리 참빗도포면에서 나오던 갈대빗자루가 유명했으나 간척으로 인해 갈대가 사라지면서 나오지 않는다. 야채류의 경우 대부분 영암산이지만, 과일은 영암보다 일찍 출하되는 나주산 비닐 하우스 수박, 참외, 토마토 등이 거래된다. 예전에는 어물이 풍부했으나 간척으로 바다가 사라지면서 생선류는 전라남도 강진군, 해남군, 장흥군에서, 젓갈류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소금은 전라남도 신안군 등에서 온다.

영암 오일장영암읍사무소가 관리하는데, 재무 담당이 점포 규모에 따라 장세를 징수한다. 2004년에는 500원, 300원, 100원씩을 징수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농촌 인구가 감소하고, 주민들이 인근 도시의 대형 할인 마트를 이용하면서 영암 오일장도 점차 쇠락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암군은 영암 오일장영암 달마지 시장이라는 별칭을 부여하고, 2005년 12월부터 2010년 9월까지 35억 9600만 원[국비 11억 600만 원, 도비 6억 원, 군비 18억 9000만 원]을 들여 문화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연장 등 시설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지장물 23동 철거, 사유지 19필지 매입, 주차장 46면 조성, 장옥 신축[15동/116칸], 어물전[1동/150㎡] 및 화장실[1동/48.6㎡] 건축, 노점 구역[104칸/막형] 및 아케이드 설치, 배수구 정비 등이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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