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오경리 신도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58
한자 吳慶履神道碑
이칭/별칭 영암 은곡리 가선대부 공조 참판 해주 오 공 경리 신도비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은곡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혜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13년 - 오경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93년 - 오경리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오경리 신도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2년 - 오경리 신도비 보수
현 소재지 오경리 신도비 -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은곡 마을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오경리
크기(높이,너비,두께) 212㎝[비신 높이]|59㎝[비신 너비]|25㎝[비신 두께]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은곡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오경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오경리(吳慶履)[1813~189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화(仲和), 호는 소포(素圃)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 오재익(吳在翼)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정채(朴挺采)의 딸이다.

오경리는 1849년(헌종 15)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고, 정자(正字)를 거쳐 1852년(철종 3)에 전적이 되었다. 이어 이조 정랑·지평·봉화 현감 등을 지내고, 1861년에 헌납이 되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870년(고종 7)에 다시 등용되어 집의가 되었다.

또한 오경리는 사간이 되어 「진시폐소(陳時弊疏)」 및 「청저양무재소(請儲養武材疏)」 등을 올려 시폐의 시정과 제도의 개혁 등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최익현 등을 공박한 권정호(權鼎鎬)와 백규섭(白奎燮)을 탄핵하여 사직하게 하였다.

그 뒤 오경리는 1882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는데, 군란이 일어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그 이듬해 공조 참판이 되었다. 오경리는 성품이 청빈하였으며, 천인 이기(天人理氣) 등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소포유고(素圃遺稿)』가 있다.

[건립 경위]

오경리 신도비(吳慶履 神道碑)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오경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20년에 세운 비석으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아들 최영조(崔永祚)가 글을 지었다.

[위치]

오경리 신도비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은곡 마을의 입구 맞은편에 있다.

[형태]

비석의 규모는 높이 212㎝, 너비 59㎝, 두께 25㎝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가선대부 공조(嘉善大夫工曹)’라고 쓰여 있다.

[현황]

오경리 신도비는 전체적으로 비석의 마모가 심하지 않고, 2002년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 시중공파(侍中公派) 후손들이 비석의 마모를 막기 위해 비석에 ‘소포공 신도비각(素圃公 神道碑閣)’을 세워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또한 오경리 신도비는 ‘영암 은곡리 가선대부 공조 참판 해주 오 공 경리 신도비’로도 불린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