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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605
한자 王仁博士-
이칭/별칭 전왕인의 묘,왕인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 왕인 박사 무덤 일본 사적으로 지정
성격 무덤
양식 원형
관련 인물 왕인
봉분 크기/묘역 면적 약 90㎝[너비]|약 80㎝[높이]|약 30㎝[두께]

[정의]

일본 혼슈 중부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에 있는 고대 왕인 박사의 무덤.

[개설]

1,600여 년 전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가 문자를 전하여, 일본 문화의 시조로 숭앙받는 백제 사람 왕인의 묘소이다. 왕인총은 1938년 오사카 부[大阪府]가 사적으로 지정한 히라카타 시[枚方市]의 전왕인묘(傳王仁墓)이다.

[위치]

왕인 박사 무덤은 일본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 후지사카 마을에 있다. 일본 현지 주소는 ‘日本 大阪府 枚方市 藤阪東町 2丁目’이다.

[변천]

일본에서는 와니[ワニ-]라고 부르며 일본 고대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 서기(日本書紀)』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1731년에 코토[京都]에 사는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竝川誠所]가 도쿄 근처 사찰에서 『왕인 분묘 래조기(王仁墳廟來朝記)』라는 문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왕인은 가와치[河內]의 후지사카[藤坂] 마을에 있는 묘에 묻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글을 읽은 나미카와는 1732년 후지사카 마을에 직접 가서 유래를 알 수 없는 둥근 자연석을 발견하고 왕인의 묘라고 생각하였다. 나미카와는 옆에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는 왕인 박사 무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태]

왕인 박사 무덤의 규모는 너비 약 90㎝, 높이 약 80㎝, 두께 약 30㎝이고, 원형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졌다.

[현황]

‘박사 왕인의 묘’라고 새겨진 자연석은 한일 간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1938년 사적(史蹟)으로 지정되고,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1984년 11월 3일 제1회 ‘왕인 박사 축제’가 열리고 무궁화 동산이 조성되었으며, 1985년 ‘왕인 박사 묘를 지키는 회(王仁塚の環境を守る會)’가 발족되고 1988년에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묘역 환경 정화 사업을 하였다. 한편 전라남도 영암군 왕인 박사 성기동 유적지 내에도 일본의 것을 모방하여 왕인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왕인의 묘는 왕인의 묘라고 추정할 만한 사료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1732년 발견된 자연석 돌에 대한 고고학자의 견해는 이러하였다. “4~5세기에 만들어진 분묘 위에 돌을 얹는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나미카와가 발견한 돌은 불교가 전해진 후 수백 년이 지나서 묘제가 바뀐 중세의 것이다.”라는 것이다. 또 전왕인의 묘를 1938년 사적 지정한 것 또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이른바 식민 통치의 기간 중에 일본은 왕인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실을 적극 홍보하였는데, 동조 동근론(同祖同根論) 곧,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뿌리가 같다.’는 논리의 전거로 왕인의 묘를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 왕인 묘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출발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참고문헌]
  • 이병연, 『조선 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보문사, 1933)
  • 두산 백과사전(http://www.doopedia.co.kr)
  • 왕인 박사 유적지(http://wangin.yeongam.go.kr)
  • 학예사 제공 자료(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 교육 위원회, 201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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